2월 3일(금)
야즈드(Yazd)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 30분이다. 새벽 시각이라 날도 춥고 정신도 비몽사몽이다.
어서 숙소를 잡고 잠을 자야 한다는 당연한 욕망이 일어났지만 히로는 5시간을 터미널에서 기다린 후 숙소를 잡아야 하루치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 터미널 대합실은 모두 문이 잠겨 있어 숙소를 잡기로 했다.
터미널은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에서 4~5킬로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택시를 타고 가야 하지만 히로는 밤이라 택시비가 아깝다고 걸어가자고 한다.
으.. 완전 질렸다.. 밤이라고 해봤자 택시비는 1인당 5000리얄(550원)인데..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모두는 히로의 말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나라 정치도 그렇고 모든 조직에서 그렇듯이 항상 강경한 주장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달밤의 국토순례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히로가 원망스러웠지만 오히려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껴야 잘 산다.’라는 일본인의 정신을 엿볼 수도 있었다.
길을 찾는 건 역시 내 몫이다.
지도에 의지한 채 1시간을 걸어가니 아름다운 조명에 비친 모스크가 나타난다. 마치 보석같다는 느낌이 든다.
시내의 모든 모스크는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조명을 끄지 않은 채 고요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자메흐(Jameh) 모스크는 옛시가지(Old City)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요 모스크라는 뜻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금요일을 주마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자메흐라고 부른다.
모스크 바로 옆에 위치한 Silk Road Hotel에 문을 두드렸다.
실크로드 호텔은 이란에서 여행자들이 꼭 묵어봐야 할 숙소 중에 하나이다. 중간급 이상의 호텔로 싱글룸과 트인룸은 비교적 비싸지만 도미토리(30000리얄)가 있어 배낭여행자들이 부담 없이 묵을 수 있다.
6인실 도미토리에 가니 한 일본 여행자가 혼자서 쓰고 있다. 이란에서는 일본 여행자 정말 많다. 하지만 한국인 여행자는 오직... Me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세면을 하려고 하니 마크가 세면실까지 직접 안내해준다. 아무래도 4~5킬로나 떨어져 있고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목적지로 똑바로 온 나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듯하다.(짜식~ 별것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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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히로와 덴도는 금요일이라 근처 식당은 모두 문을 닫았다고 한다.
다행히 호텔에는 레스토랑이 딸려 있어 간단한 아침(10000리얄)을 할 수 있었다,
야즈드는 예부터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잇는 실크로드의 중요 도시였으며 사막 한복판에 있는 오아시스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진흙 벽돌로 만든 건물로 되어 있어 옛 실크로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곳은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이고 지금도 야즈드 근교(북쪽)에 위치한 Chak Chak에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살고 있다.
야즈드의 하이라이트는 시내에서 5Km 떨어진 침묵의 탑(Tower of Silence)이다.
이름이 탑이라고 해서 거대한 탑이 있는 것이 아니라 2개의 봉우리에 각각 돌을 쌓아 올린 건축물이 있다.
그 돌탑위에서는 조로아스터 특유의 장례의식이 행해졌는데 땅과 물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시체를 새들에게 다 뜯어 먹힐 때까지 놔두었다고 한다.
3년 반전 티벳을 여행했을 때 조장(독수리에게 시체를 먹임)을 직접 봤을 때가 기억이 난다.
그때는 라마(승려)들이 칼로 시체의 살점을 뜯어 독수리에게 먹였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냥 방치만 했었나보다.
침묵의 탑에서는 1960년대에 전면적으로 금지될 때까지 수백년간 장례의식이 이루어졌다.
히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라 우리 일행은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길거리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1500리얄(160원)으로 저렴했다.(우리나라 같으면 1500원 정도).
바자르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간 후 그곳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는 왕복 20000리얄을 받았으며 침묵의 탑에 도착하고 1시간 뒤에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온다.
이마저도 히로는 비싸다며 걸어가자고 하지만 이번에는 뉴질랜드인 마크가 못 참겠다는 듯 발끈한다.
‘히로~ 그래봤자 1인당 50센트(500원) 밖에 안되.. 그러니 꼭 택시를 타자. 걸으면 1시간 이상 걸리잖아.’
히로는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택시를 탄다. 정말 대단한 일본인이다.
침묵의 탑은 이름과는 달리 오토바이 굉음으로 뒤덮히고 있었다. 휴일을 맞아 많은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오토바이를 들고 이곳에 모여 스릴과 묘기를 즐기고 있다.
2개의 봉우리 중에서 작은 봉우리에 올라가 큰 봉우리를 보았다. 봉우리 주변에는 흙으로 만든 옛 집들이 눈에 띄고 야즈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큰 봉우리를 힘겹게 올라가니 시야가 더 넓어진다. 주변 풍경을 비롯해서 온 세상이 황토 빛 세상이다.
봉우리의 돌탑 중앙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에서 장례를 치뤘다.
시내로 다시 돌아와 점심(샌드위치)을 먹은 후 모두가 각자 볼거리를 향해 흩어졌다.
난 물박물관(Water Musium)에 갔는데 바로 카낫(Qanat)을 보기 위해서이다.
카낫은 사막의 지하수로를 따라 판 우물인데 깊게는 100미터까지 팠다고 한다.
카낫을 쭉 이어서 수로를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다.
3년 전 중국 신장 투루판에서 사막한가운데인 투루판에 수천년에 걸쳐 설산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끌어들인 칸얼징이 생각이 났다.
이곳에서는 이미 2500년 전에 그러한 우물과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곳의 기술이 훗날 위구르지역까지 전해진 것이라 한다.
척박한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고 거리는 한산하다. 이번 여행의 막도 서서히 내려가고 있다.
2월 4일(토)
며칠 동안같이 여행했던 히로, 덴도, 마크와 이별을 하고 호텔을 나섰다.
야즈드 남서쪽에 있는 조로아스터교 사원(Ateshkadeh)을 찾았다. 전 세계 15만의 신도들이 여전히 찾고 있는 이 사원은 조로아스터교의 성지로서 470년부터 시작된 성화(The Sacred Flame)가 여전히 불타고 있다.(입장료는 공짜)
시간만 있으면 야즈드 근교의 조로아스터 마을을 둘러 볼 수 있을텐데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함으로 어쩔 수 없이 테헤란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시내에서 터미널까지 5000리얄(550원)을 주고 갈 수 있었다. 터미널에는 다른 도시로 가는 많은 버스가 있는데 테헤란까지는 45000리얄(5000원)이다.
야즈드에서 테헤란까지 론니에는 10시간이 걸린다고 되어 있지만 볼보 버스로는 8시간 반 정도 걸린다.
끝없는 사막을 달려 저녁 8시 테헤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어마어마한 터미널 규모에 놀랬다. 바로 테헤란 서(west)터미널이다.
이란 각지로 향하는 끝없는 버스들과 매표창구가 있다. 개중에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버스도 있다.
곧장 파키스탄이나 아프간으로 들어갈 여행자는 이곳 터미널을 이용하면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지하철을 타야하는데..
터미널을 빠져 나와 1킬로 정도 걸어 아무버스나 잡고 타니 조금 있다가 다시 터미널로 돌아온다.(허탕쳤다.)
결국 현지인들의 안내를 받아 지하철역을 찾을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니 낯선 외국인이 신기한지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영어가 조금 되는 간호사(남자)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유학을 왔다는 유학생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맘 호메이니 역에 도착한다.
Khazar Sea 호텔에 도착하니 60000리얄을 달라고 한다. 저번에 왔을 때는 그대로 줬지만 이번에는 애교 섞인 부탁으로 10000리얄을 깎았다.
여관 주인은 내 여권을 보면서 노트에 기록을 하기에 1주일 전에 이곳에 왔다고 하니까 노트를 뒤적인다.
그런데 이름은 맞는데 국적이 북한으로 되어 있다. 사는 곳도 평양으로 되어 있다니..ㅡ.ㅡ
1주일 전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후 얼마 남지 않은 돈 때문에 심각한 고민을 했었다. 돈에 굴복한 채 그때 만약 곧장 서울로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145달러로 8일 동안 이란을 여행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지금 주머니에는 이란 돈 20만마낫(2만2천원)과 미화 45달라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100달러가 안 되는 돈으로 이란의 서쪽 끝 자헤단을 시작으로 밤, 쉬라즈, 페르세폴리스, 야즈드를 알차게 여행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기분 같아서는 맥주 두어캔 사놓고 자축하고 싶지만 여기는 술이 금지된 이란 아닌가.
오늘따라 삼겹살에 소주가 무척 그립다. 한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삼겹살을 먹으리라 마음먹었다.
2월 5일(일)
오전 10시에 눈을 떠서 11시에 호텔을 체크아웃 했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나를 반겨준건 자욱한 매연과 교통지옥이다.
저녁 7시반에 비행기가 뜨기 때문에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남아있다.
다른 구경거리는 다 귀찮고 테헤란 관광의 핵심은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Iran)으로 갔다.
론니에는 입장료가 60000마낫(6600원)으로 되어 있는데 외국인 차등 요금 철폐로 5000마낫(550원)으로 입장료가 내렸다.
페르세폴리스와 수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포함해서 이라에 산재한 수많은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시대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어 관람하기가 편하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함무라비 법전이다.. 기원전 18세기 고대 바빌로니아 1901년 프랑스 탐험대가 페르시아의 고도 수사에서 발견을 한 세계적인 유산이다.
2.25m의 돌기둥으로 기둥 윗부분에는 함무라비가 백성을 심판하는 부조가 조각 되어 있다.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서 엄한 보복형 법률(눈에는 눈, 귀에는 귀)이다. 예를 들면 담장이 무너져 사람을 죽게 하면 담장을 지은 건축가의 손을 잘랐으며,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면 가해자의 눈을 멀게 했다.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함무라비에 법률을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분쟁이 있을시 지배자의 기분에 따라 판결을 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준을 두고 판결했다는 것에서 당시에는 대단히 획기적인 발상이었을 것이다.
이곳 박물관에 전시된 함무라비 법전은 모조품이다. 진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란 정부의 반환 요구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거절을 하고 있다고 한다.
100~200년전 유럽의 열강들이 개떼처럼 전 세계를 식민지화 할 때 가장 먼저 보낸 사람들이 바로 탐험대와 선교사이다.
탐험대는 고고학자도 포함이 되었는데 이들이 탐사를 하면서 발견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강대국의 박물관의 전시용품으로 흘러들어갔다.
대표적인 피해 국가는 이집트이다. 대부분의 유물들이 영국과 프랑스로 흘러들어갔지만 대부분의 유물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매번 유물 반환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가 유물을 제대로 보존할 능력이 안 된다는 이유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뭐..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역시 병자호란 때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1994년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던 서울~부산 고속전철을 프랑스형으로 선택하면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받기로 약속 받았지만 도서를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 직원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 소중한 유물들을 되찾아야 한다.
국립박물관 바로 옆에는 이슬람 박물관이 있는데 같은 티켓으로 관람할 수 있다. 이슬람 시절의 이후의 유물들을 잘 볼 수 있다.
지하철을 타고 비행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하철 타기가 여의치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그런지 혼잡하다. 무엇보다 이곳 지하철 문화는 양보를 모른다.
우리야 가지런히 줄을 서다가 지하철이 멈추면 안에 타던 사람이 먼저 내리고 줄을 선 순서대로 타는 것이 당연시 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지하철 문이 열리면 슈퍼볼(미식축구)이 시작된다. 양쪽에서 밀고 밀리며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몸싸움을 하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편인 나조차 처음에는 사람에 치여 지하철을 타지 못할 정도이다. 이란의 시민의식이 아쉽다.
이제 여행을 접을 때가 다가왔다. 공항에 가니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40일 동안 여행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얻었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어느덧 다음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지금 얻은 경험들을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일상을 향해 서울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