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금)
어제 다른 호텔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던 토모미가 사나 근교에 괜찮은 곳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한다.
사나에서 북서쪽으로 14Km 떨어진 지점에 와디 다하르(Wadi Dhahr)에 유명한 바위 궁전이 있다. 큰 바위 위에 궁전을 세웠다고 하는데 주변 풍경과 더불어 어떤 모습인지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다.
사나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택시를 잡아서 타고 가도 되지만 이런 곳을 택시를 타고 가면 진정한 빽패커가 아니지..
와디 다하르를 저렴하게 가려면 조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릴 광장 맞은편으로 건너가 조금 북쪽(한 200m 정도)으로 올라가면 미니버스(다마스 크기 만함)가 모여 있는 정류장이 있는데 ‘하사다’로 가는 미니버스(20YR)를 타면 된다.
미니버스를 타고 종점으로 가면 커다란 시장이 나오는데 시장 구경을 슬슬하면서 쭉 걸어 나오면 큰 길이 나온다. 시장에는 과일을 파는 행상들이 많으니 이곳에서 비타민 보충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바나나 1Kg에 150YR(750원)을 무척 저렴한 편이다. 덕분에 아침 식사는 바나나로 하게 되었다.
시장을 빠져나온 후 남쪽 다리를 건너면 수많은 버스들이 정차해 있는 정류장이 모일 것이다.
이곳에서 ‘자미아’로 가는 미니버스(20YR)을 타면 된다. 자미아는 사나 서쪽에 있는 대학인데 버스를 타고 가다 오른편을 보면 건물들이 띄엄띄엄 있고 한눈에 대학이라고 생각되는 건물이 보일 것이다. 조금 더 가면 멋들어진 정문이 있는데 그곳에서 내리면 된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지나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자미아 대학 정문으로 갔다. 길을 잃더라도 이곳 사람들이 워낙 친절하기 때문에 물어물어 오면 된다.
자미아 대학 정문에서 내리면 근처 가게에서 과일 주스 한잔을 하고 큰 버스가 몇 대 서 있는 정류장으로 가보자.
이곳은 ‘사무라’로 가는 버스인데 2구간에 걸쳐 요금(20TR)을 받는다.
사무라에서 내리면 와디 다하르까지는 쉐어 택시(노선이 있는 택시)를 타던지 히치를 해서 가면 된다.
우리는 히치를 했는데 와디 다하르에 이르니 웅장한 와디가 한눈에 들어온다.
Dar al Hajar 궁전은 바위 위에 세워진 궁전으로 1786년에 세워진 아름다운 궁전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관람을 하려고 하니 표를 사야 한다. 요금은 500YR(2500원)인데 비싼 돈을 내고 안에 들어가기는 좀 아깝다.
이곳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아름다운 마을에 있는데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토모미가 뒤에서 부른다.
길가에 과일과 음료를 파는 행상인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우리도 같이 와서 식사를 하라는 것이다.
토모미 덕분에 현지 식사를 배불리 먹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상인들에게 미안할 정도인데도 혹시 모자라지 않는지 물어본다.
다시 마을로 향하니 이번에는 피크닉을 온 가족들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권한다. 이제 불을 지피고 있어 마을을 본 후 다시 와서 식사를 같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와디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외국인들이 거의 오지 않아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한다.
그중에 한 아저씨가 자신의 집으로 와서 식사를 하고 가라며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한다. 토모미와 내가 Dar al Hajar궁전에서 마을까지 걸어 온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데 3번이나 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유를 받았다. 정말로 예멘 사람들은 친절하고 친근한 사람이라고 다시금 느낀다.
압둘 아저씨 집으로 가니 집안 여자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더니 온몸을 히잡을 하고 나온다. 난 외국인인데 이렇게 여자들 얼굴을 보이면 안 되나?
토모미는 부엌으로 가서 집안 여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난 압둘 아저씨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말도 안통해서 거의 바디랭귀지로 이야기 했는데 그럭저럭 통한다. 아저씨는 51살이고 아들 3명에 딸 7명이 있다고 한다. 가장 장성한 아들은 32살로 장가를 가서 10살짜리 아이가 있고 막내는 13살이다.
압둘 아저씨는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다. 기술적으로 발전한 나라이며 잘사는 나라라고 치켜세워준다. 난 아저씨에게 예멘은 남북이 통일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고 이야기 하니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외국인의 칭찬에 밝아지는 아저씨를 보며 정말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널찍한 집안 한가운데는 예멘 통일을 주도한 샬레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다. 예멘 어디를 가든 샬레 대통령 사진을 볼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지 독재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다.(사전에 공부를 안 했음 ㅜㅜ) 최소한 예멘의 대통령이 독재를 하면서 어쩌구 저쩌구 했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없는 것을 보아 이곳 사람들이 대통령에 대해 꽤 호의적이어서 사진을 건다는 추측만 가능 할 뿐이다.
압둘 아저씨를 포함해서 예멘 사람들은 한국을 ‘코리아’라고 하지 않고 ‘코리’라고 부른다. 코리아랑 다른 이름이지만 코리를 계속 되 뇌이면 ‘고려’라는 단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우리의 해상 무역은 통일 신라 시대 때부터 시작하여 고려시대 때는 절정을 이룬다. 장보고 선단이 이곳 아라비아까지 진출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고려가 이곳에 진출할 정도로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의 영어 국명이 조선이 아니라 고려(코리아)가 되었다.
발랄한 사회 분위기였던 고려에서 엄격한 유교 교리에 입각해 상인을 천대하며 외국과의 교역을 꺼리는 폐쇄적인 사회가 되면서 실크로드에서 그 이름을 지우게 된다.
만약 조선 시대 때도 외국과의 활발한 교역을 했다면 앞선 문물을 금새 받아들였을 것이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임)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동양이 서양에서 쭉 우월한 위치 있었다. 로마 황제가 한나라 황제에게 사진을 먼저 보내며 교역을 청했고 서양인들은 항상 동방에 대한 환상을 가지며 교역을 하려고 노력을 했다.
중국은 당나라와 원나라 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어 최전성기를 지냈고 이러한 문화적 발전이 서양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동방과 직접 교역을 하려는 욕구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선두로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입장이 역전 된 것은 바로 명나라 시대 때를 전후해서이다. 철저한 쇄국 정책을 펼친 콧대 높은 명나라는 외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배척을 했다.
그 결과는 어떤가? 명나라가 멸망을 한지는 수백년이 지났지만 문화적인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크게는 국가 경영, 작게는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 자기 것만 믿고 지키려는 자세보다는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압둘 아저씨 집에서 간단하게 다과를 하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많은 아이들이 외국인인 우리가 신기한지 계속해서 인사를 한다.
와디 절벽 중간쯤에서 본 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와디 도시인 사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까 피크닉을 하는 가족을 찾아가니 이미 식사를 마쳤고 대신 우리에게 카트를 권한다. 나뭇잎 카트를 씹으니 처음에는 쓴 맛이 났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그런대로 맛이 난다.
카트를 다 씹고 물을 마시나 설탕물을 먹는 듯 단맛이 난다.
물에다 설탕을 탔나? 물을 계속 마시니 단 맛이 없어진다. 다시 카트를 씹고 물을 마시니 단맛이 난다. 정말 신기한대? 카트를 씹을 기회가 있으면 다 씹고 나서 물을 들이켜 보라.
Dar al Hajar 궁전 앞으로 돌아가 사나로 바로 가는 미니버스(100YR)를 탔다.
외국인이 신기한지 버스안의 승객들이 과일을 이것저것 우리에게 준다. 오늘 와디 다하르를 보러 온 건지 먹으러 온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이다. 예멘 사람들의 순수한 영혼이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한다.
사나로 돌아와서는 타릴 광장 근처의 인터넷 카페에 갔다. 한글이 비교적 잘 되어서 네이트온으로 지인들과 긴 시간 대화를 했다.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반도에서 한국으로 채팅을 할 수 있다니 당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다.
pcsdremas@hanmail.net 가 필자의 싸이월드 아이디임으로 혹시 여행을 하면서 궁굼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