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여행기 9 김병화박물관(머나먼 이국에서 고려인과의 만남, 06.1.17)

1월 17일(화)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 식사를 늦은 시각인 11시에 했다. 주인아저씨에게 죄송스럽기는 그지없지만 아저씨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신다.

 식사를 하면서 KBS위성채널을 틀어 보니 ‘세상은 넓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중인데 마침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편’을 하고 있었다.

 ‘세상은 넓다’라는 프로그램은 여행자들이 직접 비디오를 찍어온 내용으로 여행지를 소개하는 프로인데 내가 타슈켄트를 돌아다니면서 봤던 장소들을 비교하면서 볼 수 있었다.

 어.. 그런데..

 순간 눈이 휘동그래졌다.

 그 프로에서는 ‘김병화 박물관’이 소개되고 있었다.

 김병화..

 6학년 도덕 교과서에 자랑스러운 재외동포로 소개된 분이다.

 우즈베키스탄에 방문을 하면 한번 찾아가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마침 TV에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다.

 주인아저씨에게 ‘김병화 박물관’에 대해서 물어보니 꾸일륙 바자르에서 다마스를 타고 가면 갈 수 있다고 하신다.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숙소를 나섰다. 오늘 오후 8시에 부하라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 전에는 아무 할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횡재라고 할까..

 역시 하늘은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꾸일륙 바자르에 도착해서 김병화 박물관으로 향하는 버스를 찾았지만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방향이 제각기 다르다. 신기한 것은 거의 모두가 ‘김병화’라고 하면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 다마스 운전자가 4000숨을 주면 김병화 박물관 앞까지 태워다준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차는 20분을 달려 한적한 시골 동네에 한 사거리에 도착 했다.

 다마스 주인은 이 사거리가 ‘김병화 센타(아무래도 사거리라는 뜻 같음)’이라고 하며 훌쩍 떠났다.

 사거리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아담한 건물에 ‘김병화 박물관’이라고 써 있다.

 바로 이곳이구나.

 박물관 앞에는 ‘로력 영웅 김병화’라고 쓰인 생전의 동상도 서 있다.

 그런데 박물관 문이 잠겨있다. 오늘 휴관을 하는 날인가?

 이왕 온 김에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아뿔싸.. 아까 사진을 노트북에 옮기느라 메모리 카드를 노트북에 그대로 꼽아놓은 채 왔던 것이다.

 교과서에는 김병화 선생님이 삽화로만 되어 있어 사진을 직접 찍어서 수업시간에 소개하려고 했는데..

 의욕이 확 떨어지는 순간이다.

 박물관도 안 열고.. 사진도 안 찍고..

 결국 힘없이 타슈켄트로 향하는 다마스를 타러 김병화 사거리에 갔다.

 꾸일륙 바자르로 향하는 차량을 타려는 찰나..

 아무래도 이대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관리인을 찾아서라도 꼭 박물관은 들어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다행히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다마스 기사 분에게 사정을 말하니 주변에 있는 동네 어르신들을 모아놓고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그중에 한국말을 비교적 유창하게 하시는 할아버지가 박물관 관리하는 분을 잘 안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중국 신장의 위구루 사람인데 어렸을 때부터 이곳으로 오셔서 농장에서 일을 했다고 하신다.

 고려인들과 일을 하며 한국말을 익혔고 김병화 선생님의 생전에도 같이 일을 했다고 하신다.

 무엇보다 박물관 관리인이 자신의 친척이라고 하신다.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다.

 할아버지는 허름한 택시 한대에 말을 거시더니 이내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신다.

 택시가 간 곳은 1.5킬로 정도 떨어진 농가이다. 마침 한 할머니가 산책을 나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김병화 선생님의 며느리이다.

 안내를 받아 집에 들어가니 70살이 훌쩍 넘으신 김병화 선생님의 아들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시기는 하지만 이역만리 한국에서 온 나를 무척 반기신다.

 박물관은 김병화 선생님의 며느리가 관리를 하시는데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고 겨울에 실내가 추워서 박물관을 열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하신다.

 혹시 박물관을 방문을 했을 때 잠겨 있으면 마을 사람 아무에게나 ‘장엠밀리아’를 물으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하신다.

 위구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다시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 앞에서 택시 요금을 지불하려고 하니까 위구르 할아버지는 벌써 자신이 택시요금을 다 냈다고 하신다.

 할머니의 안내에 따라 박물관의 유물과 김병화 선생님의 일생에 관해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김병화 선생님은 어떤 분인가?

 1904년 태어나셔서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때 이곳으로 오셨다. 당시 소련 공산주의에서는 개인이 땅을 갖지 않고 집단 농장을 이루면서 생산 활동을 했는데 1944년부터 농장 조합장이 된 김병화 선생님은 투철한 성실성과 노력으로 2번이나 영웅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영웅 훈장은 소련사회에서는 대단한 존경을 받는 훈장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이다. 이 훈장만 받으면 국가의 중요 인물로 아파트가 주어지고 국가적으로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최고의 훈장이다.

 이런 훈장을 두 번이나 받으신 김병화 선생님은 국가에서 박물관을 지어줄 정도로 그분의 성실성과 노력이 다른 소련사람들에게 하여금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인의 성실성을 만방에 알리신 훌륭한 분이시다.

 1974년 암으로 사망하실 때까지 황량한 사막을 푸른 목화밭으로 변화시켰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사셨다고 하신다.

 김병화 선생님은 생전에 딱 두벌의 양복만 입으셨는데 그중에 한 벌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1994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했을 때 카리모프 대통령(지금도 대통령임)과 함께 이 박물관을 방문한 사진도 있다.

 사진 바로 밑에는 카리모프 대통령의 어록이 있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러 민족의 근면함은 우즈베키스탄의 힘이다.’라는 내용이다.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인 것이다.

 생전에 쓰셨던 물건 외에도 많은 흑백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50년 이상 된 사진이라고 한다. 1950년대의 이곳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특히 미모의 고려인이 한 공장에서 웃으면서 일을 하는 사진이 인상적이다. 저 사진의 주인공은 80살이 다되어 가거나 아니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할머니에게서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1937년의 이곳 생활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킨 이유는 적성국인 일본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도 있지만 버려지다시피 한 이곳을 개간하기 위해서이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끌려온 고려인들은 가구별로 집단 농장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친척들의 생사와 소재지를 몰라서 처음에는 수소문을 했고 서신으로만 연락이 가능했다.

 그 막막함 속에서도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있던 유목민들과는 달리 고려인들은 정착 민족 특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오직맨손으로 척박한 사막을 푸른 농장으로 가꾸었다. 그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소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려인들은 세금을 전혀 내지 않고 스스로 자급자족을 할 있게끔 소련정부가 배려를 해주었다. 사할린에서 이곳까지 끌고 오기는 했지만 그나마 염치는 있었나보다.

 하지만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국가의 존폐가 걸린 전쟁에서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굶어가면서도 거의 모든 물자를 국가에 헌납을 했다.

 소련정부도 군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와중에서도 고려인들은 전장에 내세우지 않고 후방에서 ‘근로군인’이라고 부르며 군수물자 공장에 배치를 했다. 그만큼 고려인들의 성실함과 생산성을 인정한 것이다.

 전쟁 후 고려인들은 인정받기 시작했고, 많은 영웅훈장을 받는 인물들이 생겼다. 그중에서도 김병화 선생님은 성실함과 노력 그리고 타인의 대한 배려로 이곳 우즈벡뿐만 아니라 전 소련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974년에 돌아가실 때에는 수만명의 사람이 장례식에 참석을 해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방물관 안에 있는 그 당시 사진으로도 확인 할 수 있다.

 북한과 남한을 다 방문을 했다는 할머니와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현재 우즈벡은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을 하고 있다. 고려인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많은 고려인 젊은이들은 한국으로 일하러 가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한국으로 가기가 매우 힘들고, 중간 브로커에도 막대한 돈을 쥐어줘야 한다. 또한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난 할머니에게 이곳에 독일, 유태인들도 살았는지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독일과 유태인들은 거의 다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신다.

 왜 우리나라는 못하는 것인가?

 한국에 정착시키기는 힘들어도 최소한 고국에서 일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은가? 이들이 고려인들이라 불리며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나라 힘이 약하지만 않았어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만 않았어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나했던 사람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닌가..

 거의 모든 선진국은 자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선조가 이민을 왔었다는 흔적만 있으면 다시 역 이민을 받아준다.

 우리나라는 미국, 유럽의 역이민은 환영을 하면서도 중국, CIS(구소련지역)의 역이민에 대해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다.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선택한 이들의 역이민을 받아주는 것이 현실이다.

 할머니는 언제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는지에 대해 물어본다. 그러면서 예전에 MBC에서 이곳을 취해하러 온 분들이30%정도 진척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셨다며 궁굼해 하신다.

 30%나 진척되었나? 아직 10%도 안 되었던 것 같은데.. 아직 우리사회에서도 통일에 대해 이곳저곳에서 삐걱거리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난 할머니에게 북한의 GNP가 남한의 80%까지 도달을 해야 통일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했고, 아마 최소 20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말씀 드렸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할머니는 타슈켄트로 향하는 정류장까지 안내해주신다고 하신다. 같이 걸으면서 조심스럽게 스탈린에 대해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 스탈린 할아버지, 레닌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스탈린이 죽었을 때에는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땅을 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하신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그리 싫지 않은 감정을 가지신 듯하다.

 많은 이야기와 안내를 해주신 할머니는 내 손을 꾸욱 잡아주시며 다음에 또 한번 들르라고 하신다.

 인사를 드리고 타슈켄트로 향하는 택시를 세워(500숨) 꾸일륙 바자르로 간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서 부하라 행 기차표를 끊었다. 매일 오후 8시에 이곳 타슈켄트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있으며 요금은 11000숨(9200원)이다.

 처음 중앙아시아 여행을 했을 때 세 가지 목표를 세우고 여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는 실크로드를 살펴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랄해를 통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느끼는 것이고, 세 번째가 고려인들의 생활을 보는 것이다.

 세 번째 목표가 가장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목표를 달성했다.

 생각해보면 여행은 참 신기하다. 만약 내가 아침식사를 늦게 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넓다’라는 TV프로를 안 보고 지나쳤을 것이고, 박물관에 도착해서 디지털 사진기에 메모리가 꽃혀 있었으면 사진만 찍고 할머니를 뵐 생각을 안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어제 투르크맨 비자를 내가 원했던 19일(21일로 연기되었음)로 받았으면 애초에 타슈켄트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서 여행은 재미있는 것이다. 끝없는 반전..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도 결과는 항상 좋은 쪽으로 흐른다.

 로뎀에 돌아와서 삼겹살로 저녁 식사를 한 후 로뎀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드렸다. 마치 집과 같이 편했는데 떠나니 정말 아쉽다.

 홍보를 할 줄 모르셔서 그저 단기 선교팀만 맞이해주셨는데 우즈벡을 방문하는 많은 여행자들이 로뎀으로 와서 사장님과 사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꼈으면 하다.

 저녁 8시 부하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도착시간은 내일 오전 8시이니까 12시간이 걸린다. 9시간 걸리는 버스보다 느리기는 하지만 침대기차라 기차에서 푹 자고 다음날 바로 활동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침대기차는 칸으로 나눠져 있는데 한 칸에 2층 침대 2개가 있다. 기차 시설도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다.(화장실 빼고)

 나와 같은 칸에는 할머니 2분과 할아버지 1분이 있는데 도무지 대화가 되지는 않았다. 그냥 무엇을 물을 때마다 싱긋 웃기만 했다.

 한 할머니가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하기에 보여드렸다. 여권을 보시던 할머니는 깜짝 놀라신다.

 할머니는 신문지에다가 27이라고 쓰며 내가 27살(현지나이)이 맞는지 물어보신다. 새삼스럽게 웬 나이?

 맞다고 하니까 다시 놀라시면서 18살인 줄 알았다고 하신다. 어쩐지 아까 맥주를 꺼내는데 시선이 곱지 않더라.

 원래 1층 침대인데 할머니에게 양보를 하고 2층 침대에 올랐다. 누우니 흔들리는 밤기차가 느껴졌다.

 맥주한잔을 하면서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평범할 줄 알았던 오늘도 많은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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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나먼 이국에서 따뜻한 한국의 정을 주셨던 로뎀 사장님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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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고려인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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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하라로 출발하는 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