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31일(토)

오늘은 2005년의 마지막 날이다. 처음 2005년이 시작되었을 때 마지막 날을 키르키즈스탄에서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제 피곤에 지쳐 잠들어서 그런지 11시에 사비벡(주인)아저씨가 깨워주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사비벡 아저씨는 나와 캐빈에게 아침을 대접해 주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다. 사실 대화는 러시아어로 하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오늘의 미션은 비쉬켁 시내를 둘러보는 것이다. 12시 30분에 숙소를 나서 Ala Too 스퀘어까지 걸어갔다. 어제 내린 눈이 빙판이 되었다. 이럴 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넘어지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손을 빼고 걸어야 했다. 손이 매우 시려웠다.

Ala too 스퀘어에 이르자 한적했던 거리가 이내 많은 사람들도 북적였다.

Ala Too 스퀘어는 키르키즈가 독립하기 이전인 1991년까지는 레닌 스퀘어로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Erkindik(자유) 광장으로 탈바꿈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뛰는 것은 거대한 동상이다. 원래는 레닌 동상이었는데 지금은 키르키즈스탄을 상징하는 동상으로 바꿨다.

1991년 소련으로 독립을 하고 나서 러시아로부터 벗어나 독자노선을 걸으려는 키르키즈의 노력이 잘 보이는 대목이다.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역사박물관이다. 입장료는 어른이 40솜인데 매표원이 나를 학생으로 봤는지 20솜(500원)을 내라고 한다. (이런 기분 좋은 일이^^)

유물에 대한 설명은 러시아어로만 되어 있어 유물을 대충 짐작하면서 감상했다. 들어서자 마자 거대한 레닌 동상이 나를 맞아 주었다.

제법 넓은 박물관에서 난 실크로드 시대의 많은 유물을 기대했지만 마르크스, 레닌, 적백 내전등 주로 공산주의 시대의 유물과 사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무래도 공산주의 시대를 대체할만한 유물이 부족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워낙 잘 꾸며져 있어 부수기가 아까워서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박물관을 나서 두보비 공원으로 갔다. 공원으로 가는 도중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고, 잡상인들은 간식거리를 팔고 있었다. 나도 양고기 햄버거(20솜) 하나를 사먹었다.

두보비 공원 안쪽에는 Erkindik상(자유의 상)이 서 있었다.

동쪽으로 계속 이동을 하자 거대한 혁명 기념탑이 서 있다. 무슨 기념탑이 이렇게 많이 있나...

구시대적인 유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 찍을 거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은 제대로 하고 있는 듯하다.

비쉬켁에서 유명한 조형 박물관을 찾아갔지만 마침 보수중이라 문을 닫은 상태이다. 이런..

다음은 Victory square(승리공원)이다. 모스크바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조형물이 있고, 그 밑으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불꽃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고, 특별히 지키는 이는 없다. 이렇게 꺼지지 않는 불꽃을 방치해 둘 수도 있구나..

불꽃으로 다가가니 따뜻했다. 얼어 있는 손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차 대전 때 희생당한 영혼을 달래는 불꽃은 지금은 이름 모를 나그네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

승리공원을 본 후 론니를 보니.. 어라? 더 이상 볼 데가 없네.. 저번 여행 때 워킹투어를 했던 트빌리시(그루지아), 바쿠(아제르바이잔), 예레반(아르메니아)에 비해서 비교 할 수 없이 간단한 워킹 투어이다.

숙소에 돌아와 잠시 쉬고 오후 4시가 되어 이란 대사관에 비자를 받으러 갔다.

이란 대사관에 가니 아무도 없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지금 오라고 했는데.. 경비원은 오늘은 이란 대사관이 쉰다고 한다.

휴.. 어제 이란 영사가 연휴 때문에 어제 4시에 받으라는 것이었구나.. 그런데 Today를 Tomorrow로 말하면 어쩌란 말이야.. 어쩐지 이상하더라.

카작비자, 이란비자를 받는 것이 제대로 꼬였다. 뭐 일단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일단 다음 여행 계획을 세워야겠다.

저녁때는 론니에 적인 인터넷 카페에 가서 접속을 시도했지만 도무지 이곳 윈도우XP로는 한글을 읽고 쓰는 게 불가능 했다.

2시간에 걸친 노력도 허사.. 60솜(1500원)만 날렸다.

숙소에 돌아와서 책을 읽었다.

이렇게 2005년의 마지막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하지만 불행이 있으면 행복이 있는 법..

밤 10시 사비벡 아저씨는 나에게 오더니 한국과 키르키즈는 몇 시간 차이가 나는지 물어본다. 난 3시간이라고 답했다. 어? 그러고 보니 한국의 새해는 벌써 1시간이 지났네.

사비벡 아저씨는 얼른 오라고 한다. 점심때부터 사비벡 사모님과 숙소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음식을 계속 했는데 그 이유가 새해맞이 파티를 하기 위해서구나..

거실에 가보니 온갖 음식과 각종 음료들이 즐비했다. 사비벡 아저씨가 와인을 터트리자마자 나와 캐빈 그리고 사리벡 내외와 아줌마 5명은 화려한 파티를 시작했다.

인원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음식이지만 천천히 키르키즈 전통 음식들을 맛 봤다.

드디어 카운터다운이 만료됨과 동시에 12시.. 새해가 밝았다.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진다.

어디가나 새해를 축하하고 소원을 비는 것은 같구나.

나와 캐빈은 밖에 나가 불꽃놀이를 보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Ala Too 광장으로 향했다.

영하의 매서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하를 하고 있었고 저마다 불꽃을 터트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불꽃을 터트려 마치 전쟁이 일어난 듯한 분위기이다.

저마다 다른 소원들이 있고, 저마다 다른 운명들을 맞이하게 되겠지.. 2006년은 키르키즈스탄이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캐빈에게 올해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카메룬 청년 캐빈은 긴 입김을 내쉬며.

‘내 꿈을 위해서 올해 더 많은 공부를 할 거고, 각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축구 선수들을 볼거야.’

20살 청년의 야무진 꿈이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캐빈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럼 넌 2006년에 무엇을 할 거니?’

갑작스러운 캐빈의 질문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세?.. 먼저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하고.. 아무래도 방학 때는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 여행을 해야겠지?’

올 여름방학 때는 3년 전부터 후배들과 계획한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몽고에서 말을 직접 타고 몽고 초원을 횡단하는 것이다.

벌써 실천할 때가 왔구나..

올 한해도 후회되지 않은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