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수)

 

 아고라 게스트하우스의 장점은 맛있는 아침식사를 바다가 보이는 루프(지붕 옥상)에서 먹을 수 있다. 아침 식사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잘 나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직원에게 오늘 여름과 겨울철에 손님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보니 여름에는 숙소 전체가 꽉차 정신이 없을 정도지만 겨울에는 한산한 편이라고 한다. 날씨가 변화무쌍한 것을 빼 놓고는 겨울이 여름에 비해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숙소에서 식사를 하고 오전 9시 30분에 이스탄불 탐방을 나섰다. 아.. 이제 꿈에 그리던 것들을 보게 되는구나.

 

 어젯밤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블루모스크부터 탐방을 시작했다. 블루모스크는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이름을 딴 모스크로 아야소피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건물을 짓고자 했으며 1616년에 완성했다. 자미의 중앙 돔은 직경 27.5m, 높이 43m 이다. 푸른색 타일이 수 십만개에 이르고 260개의 창문과 거대한 중앙 기도 공간이 웅장함을 더해준다. 감탄을 하면서 모스크 곳곳을 둘러보았다. 신도들은 중앙 입구로 입장할 수 있지만 관광객들은 남문을 이용해야 하지만 관람을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블루 모스크 옆은 히포드롬(Hippodrome)이다. 로마 경기장이라고 불리며 주로 말이 끄는 전체 경기가 벌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에는 비잔틴 제국을 흔든 니카의 난이 발생했는데 황제는 폭도를 진압하고 수천명을 이곳에서 처형했다고 한다. 이곳은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의 중요한 장소로 제국이 혼란스러울 때면 이곳에 모인 성난 군중의 소요사태가 폭돌, 혁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엇다.

 

 히포드롬에는 세 개의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첫 번째는 4세기에 걸립된 러프스톤 오벨리스크(Rough Stone)이다. 외관을 눈부시게 장식한 청동판은 4차 십자군에 의해 약탈되어 지금은 판을 고정했던 구멍만 남아 있다. 양쪽에 두 개에 비해 초라하게 작은 스파이럴칼럽(Spiral Column)은 뱀기둥이라고 불리며 원래는 플라타이아이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그리스 동맹군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478년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건립했던 것을 330년 이곳을 도읍을 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새 수도를 장식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청동 뱀기둥의 머리 부분은 4차 십자군 병사들이 약탈해 간 것으로 알려져있다.

 

 완벽한 보존을 자랑하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Obelisk of Theodosius)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 된 기념물로 기원전 원래는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BC 1549~1503) 때 카르나크 아몬레 신전에 세운 것을 AD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이곳에 옮겨졌다. 수 천년이 지났음에도 이집트 상형문자 모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인상 깊은 오벨리스크다.

 

 카이저 빌헬름 분수(Kaiser Wilhelm's Fountain)은 1901년 오스만 제국을 방문한 독일 황제가 우정의 증표로 분수를 선물했다.

 

 분수를 지나 바실리카 지하저수조(Basilica Cistern)에 10L(6,000원)를 내고 입장을 하였다. 이곳은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콘스탄티노플 대궁전과 주변건물에서 사용할 물을 저장하던 장소였다.

 

 하지만 이 저수조의 존재는 점점 잊어지게 되었다가 1545년 비잔틴 고미술품을 연구하던 페르투스 길라우스에 의해 다시 발견이 되었다. 발견 된 후에도 온갖 쓰레기에 가득찬 곳으로 방치 되었다가 복원 공사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은은한 조명과 음악이 흐르면서 저수조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1,500년 전의 저수조에 있다는 것이 마치 과거 세계로 돌아 온 느낌마저 든다. 20분 정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수조는 폭 65m, 길이 143m 규모이며 총 336개의 기둥이 12줄로 배열되어 받치고 있는데 그중에 메두사 머리가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인상적이다.

 

 다음은 말이 필요 없는 세계적인 건축물.. 아야소피아(Aya Sofia)이다. 아야소피아는 성스러운 예지를 의미하며 이 성당은 그리스 정교의 본산이었다.(입장료 25L)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세워졌으나 계속되는 화재를 입다가 532년에 니카의 난으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세운 성당이 불타 무너져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573년 완공되었다.

 

 1453년 마호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자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고 1935년 아타튀르크에 의해 박물관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아야소피아를 짓는 데에는 제국 각지에서 운반해 온 석재를 사용했는데 성당 내의 녹색 기둥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붉은 얼룩이 있는 기둥은 레바논에 있는 바르베크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직경 31m의 거대한 돔은 높이가 54m가 된다. 이 성당이 완공되고 나서 처음으로 건물 내부에 들어간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나의 작품을 심판하실 신에게 영광을!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자신감 있게 외쳤다고 한다. 통일신라에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보나 200년 앞서 거대한 아치 형태의 건물을 지은 것은 그 당시 최첨단을 달리는 건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수 많은 전화와 지진 속에서도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임페이얼 문에서 바라보니 거대한 모자이크화가 있다. 웅장한 모자이크가 보이고 아라비아 글자를 금박으로 새겨 넣은 메달 형태의 대형 글귀도 인상적이다. 비잔틴의 찬란한 건축물에 그 이후에 이곳을 지배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문화를 살짝 덧칠한 느낌이다.

 

 ‘우와~’하면서 감탄이 절로 나온 상태에서 2층 갤러리로 가니 아래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여기서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렀다. 2층은 모자이크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성당의 모자이크화는 이슬람 지배 시절 보이지 않게 회칠되어 있다가 회칠을 벗겨내면서 복원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부 파괴도 있지만 지금까지 선명한 색채를 보존 할 수 있는 요인이지 않을까 싶다. 너무도 아름다운 모자이크 그림에 정복자들도 선뜻 파괴하기에는 꺼리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2층 모자이크화 백미는 디시스 모자이크화(최후의 심판)인데 14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중앙에 있고 성모마리아는 왼쪽, 세례 요한이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예수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 모자이크는 타일이 많이 벗겨져 있는데 이는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의해 이곳이 함락 당할 때 비잔틴 주민들이 생존을 기원하며 타일을 하나씩 벗겨 먹었다고 한다. 벗겨먹으면서도 차마 얼굴은 벗기지 못해 지금 얼굴 쪽은 또렷이 남았다.(한국인 가이드에게 살짝 들음)

 

 조예 여제의 모자이크 초상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세 명의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 때마다 초상화의 모습을 바꾸었다. 세 번째 남편이었던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의 초상은 황후보다 오래 산 덕분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조예 여제 모자이크 옆에는 아기예수를 안아든 마리아상과 요아네스 콤네누스 2세 황제가 왼쪽에 이레네 황후가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아야소피아를 나와 출구로 나오려는 순간 한 학생 무리가 모이는 것이 모였다. 호기심에 다가가니~ 유명한 모자이크화가 위에 그려져 있다.

 

 바로 10세기 말에 제작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하는 모습과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야소피아를 바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꼭 놓치지 않고 봐야 할 비잔틴의 걸작이다.

 

 아야소피아를 관람하고 나자 오전이 훌쩍 넘었지만 곧장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으로 향했다.(입장료 25L)

 

 톱카프 궁전은 아야소피아 북동쪽에 있으며 황제의 문을 지나면 궁전이 나타난다. 이 궁전은 1453년부터 1839년까지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총 4 중정으로 나누는데 1중정은 주로 일반에 개방되었으며 2중정은 궁정 업무를 보는 이들에게만 개방되었는데 오직 술탄과 술탄의 모후만이 말을 타고 중문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한다. 오른편 건물을 관람하려고 하니 개방되지 않는다고 한다.

 

 제 3 중정에서 알현실이 제일 먼저 나왔다. 이곳은 술탄이 16세기에 지어졌으며 각국의 사절들과 외교활동을 했던 곳이다. 15,000개의 진주알로 장식한 쿠션에 앉아 각국 사절들이 공물을 바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알현실 바로 뒤편에는 1719년에 지어진 아흐메트 3세 도서관을 본 후 오른편에 파견군 막사를 둘러보니 황실 옷들이 전시되어있다.

 

 다음은 이곳의 하이라이트인 황실보고이다. 황실의 미술품과 보물 보관소로 썼던 장소이며 총 4개 전시실이 있다. 휘양 찬란한 금과 보석 그로 꾸민 여러 황실물건을 볼 수 있다. 각종 보물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유명한 톱카프의 단검과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이다. 이 다이아몬드는 스푼메이커라고 하는데 쓰레기장에서 처음 발견된 뒤 길거리 행상이 숟가락 세 개 값을 받고 팔았다는데서 왔다. 그 길거리 행상이 그 물건이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황실보고 건너편에는 성스러운 유물 보관실이 있는데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발자국이 찍힌 진흙판과 모세의 의복과 지팡이 그리고 터번이 있다. 또한 다윗의 검이 전시되어 있는데 너무나 보관 상태가 진품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제 4중정에는 키오스크가 있는데 키오스크는 처음 들어보는 건물인데 유래를 보니 경사가 있을 때 특정한 인물이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듯 하다. 레반 키오스크는 지금의 아르메니아의 예례반시를 되찾아 올 때 지었으며 로 바그다드 키오스크 역시 그 이후 건립되었다. 이프타리예 정자는 1640년 이브라힘이 라마단 금식을 마친 뒤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식사를 하기 위해 지었는데 지금은 관광객들의 사진촬영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을 소년들을 할례한 방을 둘러 보았다.

 

 제 4중정은 건물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러스 해협과 골든혼이 더 인상적이기도 했다.

 

 톱카프 궁전에는 하렘이 인기 b있는 장소(15L 추가 요금)이지만 술탄이 방탕한 성생활을 했던 곳에는 별로 땡기지 않아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10L)로 발길을 돌렸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톱카프 궁전 앞 정원에 있다.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반드시 둘러 봐야 할 장소이다. 이곳은 고대 오리엔트 박물관과 고고학박물관과 타일 정자등 세 건물이 있는데 먼저 고고학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고고학 박물관에 들어가자 로마시대에 제작 된 거대한 베스(이집트 신화 속 음악, 무용, 출산의 신)이 나를 익살맞은 표정으로 맞아준다.

 

 1층은 주로 Sidon 지역에서 출토된 석관이 중심이 되어 전시가 되어 있는데 그곳을 다스린 국왕 타브리트 장례 때 이집트 석관을 다시 사용한 채로 발굴이 되 이집트 석관과 타브리트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다. 석관도 재활용을 하는구나..

 

 전체적으로 석관의 부조들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이 사자탈을 쓴 모습이 인상적인 알렉산더관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빨간색 색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1층이 큼지막한 유물을 전시를 했으면 2층은 선사시대 때부터 발굴 된 아기자기한 유물을 시대별로 잘 정리해 전시를 하였으며 3층은 트로이에서 발굴 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를 했다.

 

 이곳으로 소풍을 온 듯 현지 아이들이 단체 관람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교육을 잘 받았는지 똑바로 줄을 서서 관람을 하고 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인솔해 가면 박물관에서 떠들고 장난치는 우리 아이들과 비교가 된다. 하지만 자유롭게 관람을 못하고 줄서서 스치듯이 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관람이 될지는 의문이다.

 

 오리엔트 박물관은 고대 오리엔트 시대의 유물을 전시를 해 놓았다. 규모와 내용면에서는 고대박물관보다는 떨어지지만 그건 이스탄불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이다. 나름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톱카프 궁전을 둘러싼 굴하네 공원(Gulhane)을 걸었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는데 공원 끝에는 보스포러스 해햅과 골든혼 그리고 마드마라해가 겹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세 물길이 만나듯이 이곳 이스탄불은 역사적으로 많은 소용돌이를 겪었지만 바다는 고요히 흐르고 있다. 이제 이곳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인 이스탄불 아니 옛 지명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실감이 난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이곳을 점령한 후 이스탄불로 명칭을 변경했다는 주장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자가 빠지고 스탄티노플이 스탄불로 변경이 되었으며 이름은 기간이 자나면서 앞에 이가 붙어 이스탄불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숙소에 돌아오니 오후 4시 30분이다. 온 종일 쉬지 않고 돌아다니니 많이 피곤했다, 밀린 여행기를 치다가 잠이 들었다. 잠시 깨어나니 밤이다.. 이럴 때는 푹 쉬어야지~ 이스탄불과의 환상적인 만남은 내일도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