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일)

 

 오늘은 알바니아 Berat까지 가는 것이 목표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교통편 정보가 없는 구간이기에 일단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가기로 했다. Berat까지 갈 수 없으면 일단 알바니아 수도인 Tirana까지 가는 걸로 오늘 목표를 설정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는 가운데 오전 8시 45분 숙소를 나섰다. 버스정류장으로 찾아갔다. 호수에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론니플래닛 지도를 보면서 찾을 수 있었다.

 

 버스정류장의 경비원에게 알바니아로 가는 방법을 물으니 오흐리드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스투루가(Struga)로 가면 된다고 이야기 하면서 스투루가로 가는 지나가는 미니버스 타면 된다며 미니버스 정류장을 안내해 준다.

 

 어떤 버스가 스트루가로 가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마침 한 여인이 미니버스를 기다리기에 스트루가로 가는지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이제 버스 탈 걱정은 안해도 되겠네.^^

 

 20분 정도를 기다려 스트루가로 가는 미니버스(MDK)를 탔다. 미니버스에 마침 슬로베니아로 오늘 운행을 하는 운전기사를 만나 버스터미널까지 잘 안내받을 수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 할 때쯤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니 알바니아 베랏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엘바산이라는 도시에서 내려서 베랏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 해 엘바산까지를 표를 끊으려고 하니 매표원은 차량은 티라나행이기 때문에 엘바산도 같은 요금(800MDK)이라고 말한다. 버스 출발 시각이 오후 12:30이기에 2시간 정도를 터미널에서 보내야 한다.

 

 아침을 먹지 않은 상태라 터미널 카페에서 마끼아또와 샌드위치를 시켜 먹었다.(합쳐서 140MDK) 비가 많이 오는 가운데 카페에 앉아 분위기 있게 커피 한잔을 했다.

 

 예정 시각보다 늦어진 오후 1시 티라나행 버스가 도착해 곧장 짐을 싣고 출발했다. 운전사에게 베랏으로 가기 위해 엘바산에서 내린다고 이야기하니 엘바산보다 20Km 더 가서 내려야 베랏행 버스를 탈 수 있다며 자신이 알려준다고 이야기 한다.

 

  버스는 30분을 달려 국경으로 가더니 계속해서 기다린다. 승객 중 한명의 여권에 문제가 있나 보다. 오후 2시 5분에 국경을 통과했다, 이제 알바니아~

 

  알바니아는 마케도니아에 비해 집이 낡은 것이 눈에 띄게 보인다. 도로 사정 역시 좋지 못한 편이다. 입국하자마자 유럽 최빈국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알바니아는 2차대전에 엔베르 호자라는 인물의 지도하에 독일로부터 자립으로 먼저 독립을 하게 된다. 먼저 독립한 덕분에 훗날 티토를 중심으로 구성한 유고연방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시대착오적인 스

  탈린식 노선을 고수하다 흐르시초프가 이끄는 소련과도 멀이지게 되면서 1960년대 중국과 손잡고 마오쩌둥 방식의 정책을 펼친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지금도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그의 문화혁명과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중국 경제가 30년 후퇴한 결과를 가져왔다.

 

  호자는 1985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 문화혁명을 흉내내어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고 폐쇄적인 경제정책을 펼쳤으며 몰도바와 더불어 끝까지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은 결과 결국 알바니아를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가 되었다. 지금은 민주화가 되었지만 그 여파는 지금도 유효하다.

 

 알바니아에 입국해서 잠시 휴게소에서 쉬었다. 현지 화폐가 하나도 없어 걱정이 되었는데 그런 걱정은 휴게소가 해결해 주었다. 점심 식사 겸 초코바와 음료를 사고 1000MDK를 내니 알바니아돈 1,800레카를 거슬러 준다. 레카는 우리 돈으로 환산하려면 10을 곱하면 된다. 이 정도면 베랏까지 가는데 문제없을 것이다.

 

 오후 3시 25분 엘바산으로 도착해서 지나가고 오후 4시 15분 티라나와 베랏의 분기점인 Rrogozhina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기사는 그림을 그려가며 베랏으로 가는 미니버스를 잡는 방법을 알려준다. 짐을 내리고 갈림길에 섰는 대도 친절한 기사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티라나로 가는 버스는 천천히 출발을 한다.

 

 마침 한 청년이 미니버스를 잡고 있었는데 그 청년도 베랏으로 간다고 한다. 버스를 놓칠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얼마 안 있어 베랏 행 버스가 온다.

 

 청년 이름은 진고리이고 베랏에 대학을 다니고 있다. 전공은 IT 관련이다. 청년에게 한글로 이름을 적어주었다. 전공을 하고 있다며 한국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대해 물어보니 알바니아에서도 열풍이라면서 지금 알바니아는 강남스타일의 패러디인 티라나스타일도 유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학생에게 다소 민감한 영토 문제를 조심스레 물어보니 오랜 시간 대답을 해준다. 알바니아는 지금보다 훨씬 컸어야 했다며 그리스 북부는 원래 알바니아 것이며 몬테네그로의 절반은 알바니아계라고 한다. 마케도니아 역시 서부는 알바니아 영토여야 옳다고 말한다. 터키와는 우호적인 관계이지만 세르비아는 싫어한다고 말한다. 코소보 역시 알바니아계 사람들인데 세르비아에서 독립을 방해 한다고 분개한다. 청년을 통해 알바니아 사람들의 성향을 엿 볼 수 있었다.

 

 베랏에 도착하니 이미 어둠이 깔려있었다. 베랏의 야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베랏 백패커즈에 가니 아침식사를 포함해서 도미토리가 10유로를 한다. 오늘 손님은 나 밖에 없다고 하며 종이 한 장을 주면서 베랏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베랏의 볼거리는 물론 버스시간표까지 상세하게 나와있다.

 

 시내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알바니아 전통음식에 맥주 한잔 걸쳤는데 고급 레스토랑임에도 700레크(7,000원 정도)나온다.

 

 숙소에는 청년들 세명이 함께 있는데 손님인 나한테는 관심없는 듯 자신들은 시내에 놀러갈테니 알아서 티비를 보거나 와이파이 인터넷을 하라고 한다. 뭐~ 홀로 있는 시간이 익숙해졌으니^^ 티비를 보면서 여행기를 정리하고 내일의 여행을 계획했다.

 

 

 

1월 21일(월)

 

 숙소는 여름에는 여행자들이 꽉 차지만 겨울철에 머물 곳은 아닌 듯 하다. 자는데 추위에 부들부들 떨면서 선잠을 잤다. 두꺼운 잠바에 담요를 세 개나 덮었는데도 매우 추웠다.

일단 몸을 추스르고 나서..

 

 오늘은 베랏을 보고 티라나를 거쳐 최대한 몬테네그로까지 가는 것이 목표이다. 때문에 아침에 서둘러 일어나 산 위의 성인 Citadel으로 향했다. 어제 야경으로 보았던 마을은 같은 모양의 연속의 하얀 집들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도시 역시 아침이라 분주하게 출근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한적하게 산책을 하는 노인도 보인다.

Bachelors 모스크 뒷 편에 성으로까지 연결되는 길이 있다.

 

 다음 위키백과에 따르면 베랏은 베랏주의 수도로서 토모르 봉(2,416m) 바로 서쪽으로 오숨 강을 끼고 있다. 이 도시는 오숨 강이 가로지르며 흐르는 가파른 구릉들 사이에 있다. 계단식 가옥들과 여러 모스크 및 교회들 위로 성채의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베라트는 고대의 일리리아 지방과 에피루스 지방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많은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안티파트레이아(비잔틴의 풀체리오폴리스)가 있던 곳으로 보이는 이 도시는 13세기에 재건되어 14세기에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벨리그라드(여기서 베라트라는 이름이 나옴)로 개칭되었다. 이곳은 19세기에 투르크의 대관 알리 파샤에 의해 다시 요새화되었다. 투르크인들이 세운 다리(1780)가 서안의 그리스도교도들의 지역인 고리차(슬라브어로 '작은 촌락'이라는 뜻)와 동안의 이슬람교도 지역인 모레트체레피를 연결한다. 19세기말에는 알바니아 남부의 주도로 알바니아 민족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알바니아 연맹'을 지원하는 주요거점이었다. 또한 1944년에는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던 '반(反)파시스트 민족해방협의회'가 알바니아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베랏에 대해 론니에서는 알바니아에서 꼭 들려야 할 도시로 선정하고 있으며 '천개의 창문을 가진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르막길을 15분 정도를 걸어 Citade으로 올라가니 이곳이 왜 역사적으로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성 위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이 다 보이고 워낙 험한 지형이라 수비하기에도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높은 지역이라 주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성의 북쪽 입구에 들어서자 녹이 쓴 대포와 기관포가 보인다. 북쪽에서 서쪽 성벽을 따라 Theodore교회-Mary Blachemae교회-Nicholas교회 순서로 돌아보았다.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다는 것은 아니고 좁은 지역이다보니 성벽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된다.

 

 모든 집들은 붉은 계통으로 지붕을 통일해 집이 마치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을 준다. 남쪽의 Red 모스크는 15세기에 세워진 베랏 최초의 모스크지만 지금은 미나렛 기둥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가장 좋은 View Point는 제일 남쪽부근이다. 사령부가 있음직한 이곳에는 방송 송신탑이 세워져 있고 거기서 남쪽으로 접근하면 아찔한 절벽이 있다. 밑을 내려다 보면서 떨어지지 말라고 손잡이까지 있을 정도니.. 손에 닿을 듯이 숙소가 보인다.

 

 Citadel 탐방을 마치고 숙소에 오니 오전 9시 반이다. 아침식사가 제공이 돼서 가서 먹으면 될 줄 알았는데 재료를 꺼내 놓더니 알아서 해먹으라고 한다. 무슨 요리를 하라는 건지..

이왕 이렇게 된 것 배낭에 남은 라면 하나를 꺼내 끓여먹었다.

 

 알바니아에 들어와서 고민 되었던 것이 환전이다. 어제 마케도니아돈을 환전한 알바니아돈이 있기는 하지만 모자를 것으로 예상이 되고 그렇다고 환전을 하자니 내일 오전이면 떠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돈이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할 때 20유로 지폐를 건네며 나머지 10유로는 알바니아 돈으로 달라고 하자 주인장은 인터넷으로 환율을 체크하더니 1400레카를 준다. 나름 성공적인 소액 환전. 이로서 당분간 돈 걱정은 끝~

 

 오전 10시 30분 버스정류장에 가니 미니버스 기사가 티라나로 간다면서 어서 타라고 한다. 큰 버스와 미니버스가 있는데 기동성에 있어서는 미니버스가 더 빨리 갈 것 같아 그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버스는 2시간을 넘게 달려 오후 12시 45분에 티라나로 도착했다. 티라나 시내를 좀 둘러보고 바로 알바니아 북부의 스코드라(Shkodra)행 버스를 타기로 했다.

 

시내에서 사람들을 내려주던 미니버스 기사가 나보고 어디로 가는지 물어본다. 기차역 부근으로 간다고 하니 이미 지나쳤다면서 시내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한다.

 

그럼 티라나에서 유명한 피라미드(공산 정권 시절에 만든 구조물)이 어디인지 물어보니 거기는 쭉 걸어가면 된다면서 방향을 알려준다. 버스 요금은 500레카(5,000원)를 지불했다.

 

 버스 정류장이 기차역 부근에 있기 때문에 스코드라행 버스 편을 알아보고 시내를 둘러보려고 했는데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이 시내를 본 후 바로 버스에 타면 되기에 더 괜찮게 되었다.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인파가 길을 지나갔다. 기사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걸어가자 스칸데르베그라(Sheshi Skenderbei)광장이 나오고 그 중심에는 스칸데르베그라 동상이 보인다.

알바니아는 발칸반도에서 비교적 일찌감치 독립국가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라는 영웅이 나타나 1468년 오스만 투르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443년부터 25년 동안 독립을 유지한 역사가 있다. 거의 알바니아에서는 역사상 유일하게 독립을 한 시기이기도 한다. 그의 죽음으로 다시 오스만투르크의 통치를 430년 넘게 받긴 했지만 그 정신을 잊지 않고 훗날 독자적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알바니아 사람들은 민족의 영웅으로 스칸데르베그를 기억하고 있어서 스칸데르베그 가문의 독수리 문장이 알바니아 국기 한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알바니아는 공산당 지도자 엔베르 호자의 독립 투쟁으로 1944년 독일로부터 독립해 건국했습니다. 그 이후에 유고연방이 형성되었기에 알바니아는 독자적인 독립국가가 되었다. 엔베르 호자가 좀 더 민족을 위하고 선견지명 있는 지도자였으면 지금의 알바니아의 운명은 많이 변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광장에서 내려가니 피라미드가 보인다. 볼거리가 거의 없는 티라나에서 유일하게 볼거리라고 꼽히는 흉물인 피라미드, 아니 피라미드형 건물은 1988년 지어진 사회주의의 상징물로 지금은 유리가 깨지고 여기저기 낙서가 되어 있는 흉물로 남아있다. 여기서 한 컷 찍고~

 

 이 피라미드보다 더 큰 피라미드가 알바니아 전체를 뒤 흔든 사건도 있었다. 독재자 호자의 사망과 함께 동유럽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알바니아에서 1992년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개혁적인 경제정책을 표방한 민주당 정권은 한 달 이윤을 600%까지 주는 금융상품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투자를 받아서 국민의 1/3이 투자를 했다. 하지만 곧 정치자금으로 활용되며 국민을 속인 것이 발각되어 내란으로 치닫고 결국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조기총선을 실시, 다시 공산당인 사회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정부 차원에서의 피라미드 금융사건은 억압과 폐쇄로 점철된 알바니아 통치체제의 취약함과 국가운영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피라미드 관람을 마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티라나에서 얼마 안 되는 또 다른 볼거리인 역사박물관은 입구의 그림을 보면 공산당 시절 세워진 건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월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시내 관람을 마치고 기차역으로 가서 스코드라행 버스를 타려고 하니 스코드라행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답도 제각각이다. 어디에 있는 것 같은데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다행히 한 행상의 도움으로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기차역에서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스코드라 버스가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스에 올랐을 때 갑작스레 많은 비가 내린다. 만약 버스정류장을 찾지 못했으면 지금도 비를 맞고 있겠지?

 

 오후 2시 30분 스코드라행(300레크)가 출발한다. 시내를 벗어나니 한적한 시골이 나온다. 달리는 버스에서 풍광을 감상하며 달렸다.

 

 오후 5시가 가까웠을 때 스코트라에 도착을 했다. 이미 어두워지는 상태가 오늘내로 몬테네그로로 가는 건 힘들고..

 

 시내 광장 주변의 Murubi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비는 하루에 23유로~ 지금까지의 숙소중 가장 비싸다. 그래도 아침이 포함이 되고 다른 시설은 만족할 정도이다.

 

 비가 오는 가운데 식사를 하려고 돌아다니니 피자 가게가 볻인다. 그럼 입맛에 맞는 피자를 먹어볼까? 이곳 피자는 조각으로 파는데 1조각 당 100레카이다. 세조각과 콜라와 맥주를 사고 호텔에서 배불리 먹었다.

 

 짧지만 그래서 아쉬운 알바니아도 내일 아침이면 떠난다. 앞으로의 긴 여행을 위해 푹 자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