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금)

오늘 레소토로 가기 위해 갈 길이 바쁜 날이다. 더욱이 교통편이 확실하지 않아 숙소에서 일찍 출발했다.(오전 7시)

더반 인근의 피터마리츠부르그로 가기 위해 Berea기차역 근처 마켓으로 갔다. 버스는 많이 보이는데 피터마리츠부르그로 가는 버스 편을 알아보니 이곳에서는 없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론니에는 이곳에서 인근 도시로 출발한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노점에서 아침거리로 바나나와 자두를 사고 버스편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자신이 안내해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한다.

청년을 따라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오른쪽 바지 지갑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그리고 두 명이 옆에 붙어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 순간이라 당황하기는 했지만 지갑을 뺏기지 않도록 오른쪽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지갑을 빼지 못하자 손을 집어넣은 사내는 칼을 빼들더니 위협을 한다. 다행히 칼이 날카롭지 않고 돈까스 써는 용도와 비슷한 칼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싸워볼만 하다. 칼로 공격하면 왼손은 조금 다치는 것을 각오하고 칼을 막아내고 오른쪽 주먹으로 턱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칼 든 사내를 노려보았다.

잠시 실랑이가 벌어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였는지 셋이서 나를 넘어트리고 도망친다. 나를 유인한 청년을 잡으려고 그 청년과 마주치자 손살 같이 도망친다. 그제야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와 괜찮은지 묻고 잃어버린 건 없는지 걱정한다.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잃어버린 건 없고 아까 산 과일이 길가에 흩어졌다.

불과 10초 만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고 얼떨떨했다. 지갑 안에는 달러와 랜드화가 섞여있었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50만원 정도 되었다. 돈은 물론 신용카드 여러 가지 처리하느라 더 이상 여행 불가능 했다. 당연히 여행을 중단하고 이번 여행은 여기서 마쳐야 했다.

일단 배낭을 챙기고 이 지역을 벗어나려는데 한 인도 청년이 붙더니 자신은 착한사람이라고 강조하며 자신이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봉변을 당한 직후라 누군가 따라오는 것에 대해 극히 경계하는 상황이라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니 아프리카 사람은 믿으면 안 되지만 자신은 착한 인도인이라며 자신은 믿어도 된다고 계속 이야기 한다.

청년은 미니버스 한대를 세우더니 피터마리츠부르그까지 500R를 주면 된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혼자 버스편을 찾아가겠다고 하니까 20R를 주면 버스편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깜짝 놀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돈을 뜯으려고 하다니.. 따라온 거리가 멀어 땅에 떨어졌던 과일을 인도 청년에게 주자 청년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

피터마리츠부르크(40R)행 버스는 Alice St의 KFC 거리에서 수시로 출발한다. 버스를 탄 상태에서 10분 정도 기다리자 오전 8시 40분에 출발했다.
버스를 탄 상태에서 론니를 보니 Berea기차역 인근 마켓은 절대로 외국인 혼자서 다니면 안 된다고 경고를 해 놓았다. 이런 지역을 외국인인 내가 배낭을 메고 다녔으니.. 다행히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려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여행 막바지라 잠시 방심을 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고 경계해야겠다.

남아공은 여행 전부터 최악의 치안이라고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직접 당해보니 최악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웬만하면 가이드북에 위험하다고 표기 된 곳은 절대 가지 않는 것이 좋고, 혹시나 가게 되어 길을 묻게 된다면 먼저 다가와 안내해주겠다는 사람들은 절대 경계해야 한다. 요하네스버그에서도 느꼈지만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외국인을 뜯어내기 위해 접근을 하는 것이다.

단지 길을 물을 때에는 신분이 확실한 경찰관을 비롯해 상점주인이나 운전사 등 비교적 안정 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외국인에게 해악을 끼칠 염려가 없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물어보는 것이 안전하다는 여행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오전 9시 반에 피터마리츠부르그에 도착했다. 참 우여곡절 끝에 왔다. KFC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향후 계획을 세웠다.

피터마리츠부르그는 더반인근의 도시로 나탈 식민지와 나탈의 중심지로서 개척도시이다. 줄루족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가 인솔하는 보어인들은 1838년 나탈 공화국을 건설하고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이들의 리더인 피터 모리츠 레티프와 겔트 마리츠의 이름을 합쳐 지금의 피터마리츠부르그가 탄생하였다. 나탈 공화국이 건설 된지 5년 후에 영국 식민지로 흡수 되었으나 개척자의 후예라는 긍지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아무리 일을 당해도 여행은 여행.. 일단 이곳에서도 볼거리는 보고 가기로 했다. 터미널 인근에 개척자 박물관인 Msunduzi 박물관(8R)에 가 관람을 하였다. 박물관은 비교적 보어인의 개척 과정을 비롯한 각종 인종에 관한 전시가 되어 있으며, 개척 시대의 유물을 비롯한 줄루족 왕의 의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 그 시대의 생활상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다.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언더베르그(Underberg)로 가는 차편을 물어보니 기차역 근방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고 한다. 가는 도중 간디 동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정류장에 가니 마침 언더베르그 행 버스가 출발 직전이다. 내가 타자마자 바로 출발한다.(60R, 오전11시)      

출발하자마자 교통사고가 나는 것을 목격했다. 두 차가 정면으로 부디 친 모양이다. 평소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일진이 좋지 않다. 오늘 하루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겠다.

버스는 산악지역으로 들어서자 계속되는 오르막의 연속이며 주변에는 아름다운 산악 풍경이 펼쳐진다. 남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라 생소한 느낌이다.

12시 40분에 언더베르그에 도착해 국경까지 가는 버스편을 알아보았다. 레소토로 가는 길은 다른 편한 루트가 있기는 하지만 교통편이 열악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이곳에 온 것은 Sani Pass로 입국하기 위해서이다.      

레소토의 역사와 사니 패스를 이해하는데 좋은 경향신문에 기사가 있어 소개하겠다.


2008년 5월 1일자 기사

사니 패스를 이해하려면 아프리카 역사를 조금 들춰야 한다. 18~19세기 아프리카는 대혼란에 빠졌다. 백인과 백인, 백인과 흑인, 흑인과 흑인의 전쟁이 끝이질 않았다.

1820년 영국은 남아공의 케이프 콜로니에 5000여명의 자국민을 이주시켰다. 이들은 17세기부터 정착한 네덜란드인의 후손 보어인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게 된다. 영국은 노예제를 무효라고 선언했고, 보어인은 반발했다. 남아공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영국인과 보어인은 더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보어인들이 어찌 세계 최강이던 영국군을 이길 수 있겠는가? 결국 쫓기다시피 케이프콜로니를 떠난 보어인들은 새로운 정착촌을 찾아야 했다. 이들을 미국의 개척자에 비유해 ‘보어트레커’라고 하는데 이중 일부는 드라켄스버그 산맥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드라켄스버그 산맥은 레소토와 국경을 이루는 180㎞의 거대한 암벽이다. 보어인들은 이 땅의 주인이었던 부시맨을 밀어냈다.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던 부시맨은 백인들에게 쫓겨 지금은 칼라하리 사막과 보츠와나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한편 흑인들도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검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던 줄루족 추장 샤카줄루가 아프리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창으로 다른 부족을 굴복시켰던 샤카줄루는 잔인했다. 전쟁에 진 부하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보어인에게, 샤카줄루에게 쫓기던 부족이 바로 바소토족이다. 바소토의 추장 모쉐쉐는 결단을 내려 부족을 이끌고 산악지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산 꼭대기에 섬 같은 고립된 나라를 세웠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햇살을 볼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며 신에게 감사했다. 바소토족의 역사에는 거대한 이주를 바로 ‘디파콴’이라 하고, 줄루족 사람들은 ‘엠페간’이라고 한다. 디파콴은 강제이주, 엠페간은 격파다.

바소토족은 모쉐쉐 국왕의 탁월한 외교술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를 고문으로 뒀던 모쉐쉐는 영국과 보어인의 전쟁 때 영국까지 건너가 영국 편을 들었다. 아마 자신의 땅을 침범한 보어인이 미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바소토랜드란 이름으로 영국보호령이 됐고, 이후 자치령을 거쳐 1966년에는 레소토란 나라로 독립했다.

사니패스는 바소토족이 다녔던 길 중 하나다. 국경으로 이르는 길은 모두 13개인데, 사니패스가 가장 높다. 장제스군에 쫓기는 홍군의 장정에 비유하기는 조금 어색하지만 바소토족도 눈물깨나 흘렸을 게 분명하다. 운더버그에서 먼지를 풀풀 날리는 길을 30분쯤 달리니 ‘굿 호프’란 가게 터가 나왔다. 불과 수십년 전만해도 레소토공화국의 바소토 부족들이 내려와 물물교환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해발 1968m 남아공 국경검문소를 지나면 길은 점점 더 험해진다. 울퉁불퉁했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가이드는 이걸 ‘아프리칸 마사지’라고 했다. 차가 처음 올랐던 것은 1948년이니 60년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도 바소토족은 나귀에 양모와 면화를 싣고 이 길을 오간다. 차량들이 잘 보이게 나뭇가지에 붉은 깃발을 들고 산을 오르는 바소토족의 모습은 지금은 우스꽝스럽다.

요즘은 바소토족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다. 지프는 물론 모터사이클과 사륜 오토바이까지 다양한 레저용 차를 볼 수 있다. 길에서 마주친 독일인 여성 시몬(34)과 캐나다인 조나단(24) 커플은 “100만원에 오토바이를 사서 사니패스에 도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보츠와나를 거쳐 카이로까지 오토바이로 횡단할 계획이라고 했다.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펼쳐진 길에는 자살언덕, 헤어핀, 아이스코너, 그레이코너, 큰바람 코너 등 독특한 이름이 붙어있다.

길은 올라갈수록 장관이다. 산들은 겹겹이었고, 계곡은 가팔랐다. 오른쪽으로는 12사도로 불리는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이 웅크린 사자처럼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4시간 만에 오른 정상 사니탑(2873m). 국경엔 철조망도 없었다. 돌멩이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게 전부. 가이드가 검문소에서 여권에 도장을 찍어오는 동안 관광객들은 여권 검사도 없이 마을 구경을 시작했다. 마을엔 바소토 원주민 82명이 살고 있었다. 거적대기 같은 담요 하나를 둘러메고 있는 주민들의 차림새는 남루했다. 마을 자체가 난민촌 같다. 아이들은 외국인을 볼 때마다 검고 때 묻은 손을 내밀었고, 관광객들에게 받은 사탕을 들고 달려가 어머니의 젖가슴 속에 파묻었다. 원주민들의 집은 원뿔 모양이었는데 문은 모두 북향. 남반구라 북향이 햇살이 잘 든단다. 우리의 온돌처럼 불을 피우면 온기가 돌게 바닥에 구들을 깔았다고 한다. 한 원주민 여성이 내놓은 빵엔 누룩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버스는 한참을 기다리더니 국경(22R)으로 출발하지만 바로 국경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 갈아타야 한다.

사니패스 입구에서 여권을 등록하고 사니톱까지 가는 버스편(60R)으로 갈아 탔다. 오후 3시에 출발하니 남아공 국경에는 3시 40분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 1968m 지점. 주변 풍경은 아찔한 산악 지형이 드러난다. 티베트를 여행했을 때의 풍경과 흡사하다.

여기서부터 레소토 국경인 사니톱(Sani Top)까지는 경사가 심한 길이 시작된다. 길이 험난해 중간에 내려서 걸어가는 구간도 있다.  

오후 4시 40분에 사니톱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 2873m로 양옆으로는 절벽이 쭉 펼쳐져 있으며 주변에는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안개가 자욱하기는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지형이다. 국경사무소 직원은 내 여권에 스탬프가 많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며 신기해한다. 별로 어렵지 않게 레소토 입국 도장을 받고 레소토에 들어서니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의 명소는 사니톱 샬레(Sani Top Chalet)이다. 이곳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펍(Pub)이 있다. 도미토리는 펍에서 500m 떨어져 있으며 R175이며 저녁 식사비 85R를 미리 내면 저녁식사를 준비해준다. 맥주는 R15이고 콜라는 R10이다. 발코니에는 아래 절벽을 바라보며 식사와 음료를 즐길 수 있게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다.

펍에는 각국의 화폐가 전시되어 있는데 유독 한국 돈이 보이지 않는다. 종업원에게 한국 화폐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배낭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 기증하였다. 돈에다 사인을 하고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인 간판 위에 중국돈을 밀어내고 우리나라 돈을 붙였다. 혹시 이곳을 방문한 분 중에 이곳을 방문하면 1,000원짜리 지폐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미토리까지는 종업원이 차로 태워주었다. 펍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어 한번 오고 나면 펍으로 갈때에는 주변 풍경을 보면서 걸어서 왕복해도 괜찮은 거리이다.  

도미토리의 손님은 나와 한사람이 더 묵고 있다. 명성에 비해 이곳에 온 여행자들이 적어서 아쉽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이 모여 왁자지껄 이야기를 하면 즐거울 텐데..  

오후 7시에 펍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저녁 식사는 닭고기와 감자 요리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메뉴가 나오는데 꽤 먹을 만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맥주를 시켜 한입 들이켰다. 높은 지대에서 먹는 맥주 맛이란..  

비록 펍의 손님은 나 밖에 없지만 어두운 조명에서 홀로 맥주를 들이키며 감상에 잠겼다. 오늘처럼 다사다난한 날이 있었던가?

오후 10시가 되자 이곳도 문을 닫는다. 내일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잠들었다. 사실 잠자는 것 이외에는 할 것이 아예 없어 그냥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