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수)

네이버 백과사전과 위키 백과에 부룬디의 최초의 거주자는 피그미족인 트와족이다. 그들은 반투족의 이주 도중에 반투민족에 대부분 대체되고 흡수되었다.

왕국은 14∼15세기경 에티오피아 방면에서 남하한 푸치족의 왕조가 후투족을 지배하며 건설되었다. 부룬디는 북쪽의 르완다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1885년 콩고분지 조약에 의하여 1890년부터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콩고에서 진주한 벨기에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독일이 패망하자 ‘르완다-우룬디’로서 1923년 벨기에 통치하의 국제연맹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1946년 말에는 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1957년부터 일기 시작한 ‘르완다-우룬디’ 민족독립운동은 르완다와의 통합에 의한 즉시 독립을 요구하였으며, UN도 르완다와 우룬디가 연방국가로서 독립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르완다에서는 소수민족인 푸치족 왕의 지배에 항거하여 다수 민족인 후투족이 폭동을 일으켜 국왕을 추방하였고, 이들은 1961년 l월 28일 공화제를 선포하였다.

르완다와 달리 군주제를 고수하던 우룬디는 1962년 이후 다섯 차례의 쿠데타를 통해 종족간의 보복전을 지속해 왔다. 1987년에는 투치족의 부요야 대통령이 취임하여 민주화를 꾀하여 1990년에는 민간정부가 복귀하였다. 1992년 대규모 유혈충돌 및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러한 정국에도 불구하고 동년 4월 부요야 대통령은 다당제 개헌 및 후투족의 영입을 통한 권력 안배 정책을 실시하여 내전의 종식을 꾀하였다. 이에 따라 1993년 6월 최초의 복수정당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지배층을 형성해 온 투치족을 누르고 다수파 후투족이 역사상 최초로 정권을 잡아 은다다예 대통령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동년 10월 투치족 장교들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여 민선 은다다예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이어 1994년 4월 후임 후투족 출신의 누타리야미라 대통령도 암살당하여 내전이 재발되었다.

내전의 양상은 주민의 14%에 불과한 소수파인 투치족이 다수파(84%)인 후투족을 지배하면서 갈등이 끊이질 않는 것은 르완다와 비슷하다.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해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던 르완다와 달리 부룬디는 국제 여론에서도 외면 받은 측면이 있다.

평화 협정에는 후투족 2대 반군인 민족해방군(FNL)이 협정 참여를 거부하다가 2009년 FNL이 무장해제에 들어가면서 이 땅에도 평화가 왔다. 다수 부족인 후투족과 소수 부족 투치족 간의 갈등으로 촉발된 부룬디 내전은 지금까지 30여만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낳았다.

이 땅에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나에는 어제 카메라 분실에 이어 또 하나의 불행이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갑이 없어졌다. 어제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지갑이 흘러내린 것 같다. 누군가가 가져갔을 것 같은데 돌려 줄 것 같지는 않고..

이번에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지갑의 돈은 30,000프랑만 있다는 것인데 우리 돈으로 2만원이 좀 넘는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지갑 안의 신용카드가 문제다. 다행히 숙소는 와이파이가 되기 때문에 카드 이용 정지를 하려고 했지만 그 놈의 로그인 속도 때문에 접속이 되지 않고 그마져도 오전 8시가 되자 전기가 끊기면서 와이파이도 되지 않는다. 결국은 한국의 동생들에게 급히 전화를 해서 신용카드 정지를 했다.

부룬디에서 연이은 불행이 찾아왔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겠지.. 일단 시내를 탐방했다.

부룬디는 완전한 평온을 찾은 지 불과 3년이 채 안되어서 그런지 수도인 부줌부라조차 별다른 건물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아침에 분주히 다니는 사람들만 눈에 띌 뿐이다. 론니에 조차도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것으로 시내에는 볼게 없다. 괜찮은 장소로는 부줌부라에 인접한 탕가니카(Tanganyika) 호수에 괜찮은 해변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시내 탐방 도중에 외교부에서 문자가 왔다. ‘귀하는 여행 제한국을 여행 중이나 위치를 확인 해 달라..’라는 내용의 문자이다. 부줌부라가 반군이 활동하는 콩고 민주 공화국 서쪽 지역과 바로 인접해 있다.

로밍이 편하기는 한데 이렇게 외교부의 감시를 받을 수도 있구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괜찮은 감시이다. 외교부와 통신사에서 언제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지?

현지 돈이 없기 때문에 환전을 하거나 ATM을 찾아 인출을 해야 하는데 얼마 전까지 부룬디에는 ATM이 없다는 소식을 들어 큰 기대는 하지 않는데 시내 ATM에 VISA 신용카드를 넣으니 인출이 된다. 지갑에 넣은 신용카드 이외에도 배낭에 분산 시켜 놓은 신용카드가 빛 을 발하는 순간이다. 부룬디를 빠져 나갈 20,000프랑을 인출했다. 이곳 환율은 1$에 1316부룬디 프랑으로 우리 돈의 약 0.9배이다.

르완다로 향하는 버스는 시 외곽의 시오니 마켓에 있어 택시를 타고 갔다. 3,000프랑이 들었는데 어제 같으면 저렴한 교통편을 이용했지만 지금은 안전하게 부룬디를 빠져 나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시오니 마켓에서 부룬디~르완다 구간을 운행하는 New Yahoo 버스 오피스에 가니 오늘 운행 편은 모두 만석이 되었다고 한다. 영어가 되는 청년을 찾아 르완다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으니 로컬 교통을 이용해야 하며 시 외곽으로 더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오토바이 한 대를 세워주며 기사(500프랑)에게 국경 마을인 카얀자(Kayanza)로 가는 버스편으로 안내해 달라고 설명한다. 힘든 상황에서 이렇게 친절한 청년이 있어 힘이 난다.

버스 정류장을 보니 어제 카메라를 도난 당한 그곳인 것 같다. 긴장 된 상태에서 카얀자로 가는 버스편(5,000프랑)을 탔다. 여느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손님이 다 찰 때가지 가지 않는다.

1시간은 더 기다려 10시 49분에 북쪽으로 출발했다.

호숫가의 부줌부라를 떠나면 곧장 산 위의 길로 들어서는데 위에서 바라보는 부줌부라의 모습이 평온하고 아름답다. 언젠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그런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

부룬디는 전체적으로 산악 지형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이용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느리게 산악을 오르는 트럭 뒷부분을 자전거를 탄 채 잡아 힘들지 않게 올라간다. 간간히 트럭 뒷부분에 올라서 타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렇지만 시속 60Km가 넘는 속도에도 트럭 뒷부분에 매달린 채 달리는 자전거를 보면 꽤 위험해 보인다. 트럭 운전자는 차의 동력을 이용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매달린 사람들을 배려해 속도를 줄이지는 않는다.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해 내내 산악 길을 달려 오후 12시 50분에 카양자에 도착했다. 카양자에서 요금을 4000프랑을 지불했다. 원래 5000프랑을 불렀지만 아까 정류장까지 타고 온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2000프랑을 주니 버스 주인 500을 받고 2000프랑 지폐를 줬었는데 그 금액을 감 한 것 같다.

카양자에서 국경까지 가는 합승 승용차(2000프랑)를 타고 국경으로 가 부룬디 출국 수속을 밟았다. 드디어 부룬디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르완다는 국경 비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에 변경이 되어 인터넷으로 신청해서 입국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국경에서 낭패를 보는 사례가 있었다. 나 역시 여행에 임박해서 이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비자 폼을 신청했다. 트랜짓 비자라 하루만에 입국 허가증이 나왔다.

입국허가증을 보여주고 트랜짓 비자 30$를 지불했다. 입국 허가증에는 1월 3일~5일까지로 명시가 되어 있어 오늘 하루 늦어서 시간 더 달라고 하니까 이민국 직원은 에누리 없이 5일인 내일까지 르완다에서 출국해야 한다고 답한다. 국경에서 후예(Huye)까지 가는 차편에 탔는데 고장을 일으켜서 그런지 매우 느리게 후예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국경에서 가까운 후예(Huye)에서 기콩고로(Gikongoro)로 가서 1994년 제노사이드(대학살)에 관련 된 자료를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기에 곧장 수도인 키갈리(Kigali)로 가기로 결정했다.

어느 도시에서나 나를 반겨주는 웨스턴 유니온에서 50$를 환전했다. 환율은 1$에 604르완다프랑으로 우리나라 돈의 1/2 정도로 계산하면 된다. 환전을 하고 바로 앞의 정류장에서 키갈리 버스 편을 알아보니 4시 반 차에 2600프랑이다. 우리 돈으로 5200원 정도.

요금이 비싸다고 생각되지만 정찰제이고, 시간도 꼬박 잘 지키며 무엇보다 정해진 좌석 이외에 승객을 태우지 않는다.

차창 밖의 르완다는 부룬디와는 전혀 다르게 발전이 되어 있다. 사람들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를 건 없지만 도로와 집이 잘 정비되어 있고, 깔끔한 모습이다. 르완다는 우리나라 기업과 KOICA가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인터넷 환경을 구축해줘서 그런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친절히 대해준다. 다만 불어권이라 말이 안 통해 답답하다.

버스가 중간에 멈추거나 승객을 더 태우며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음에도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키갈리에 도착했다. 키갈리는 전체적으로 산 위에 있는데 터미널은 시내 아래쪽 계곡에 위치해 있다. 어제와 같은 전철 밟지 않으려 곧장 택시(3000프랑)를 타고 시내로 올라갔다.

내린 곳은 Hotel des Mille Collines이다. 바로 영화 ‘호텔 르완다’의 실제 장소로 2차 세계 대전 유태인들을 구해 냈던 쉰들러 리스트와 비슷한 이야기를 품은 르완다 내전 당시의 실제 장소이다.

영화는 르완다 사태에서 시작되는데 르완다 사태는 100일 동안 100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나라는 황폐해졌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만을 따지느라 르완다의 비극적 상황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르완다에 파견된 UN군은 ‘평화유지군’의 자격으로는 내전 상황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치군의 폭력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나마 자국민 보호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철수 명령을 받아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르완다의 ‘밀 콜린스’ 호텔에는 학살을 피해 1,268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을 보호하기에 호텔 지배인인 폴 루세사바기나의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그러나 호텔 밖은 이미 끔찍한 살인 현장으로 변해버린 상태. 폴과 그의 가족, 그리고 1,268명의 사람들에게는 호텔이 최선의 피난처였다.

자신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노력이라고 판단한 폴은 후투족 자치군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놀라운 용기로 100일의 긴 시간 동안 1,268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낸다.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지금 생존해 있으며 벨기에서 사업을 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고 지금은 영웅으로 2005년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아프리카판 <쉰들러 리스트>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유서 깊은 호텔에 도착했지만 밤에 도착해 호텔을 둘러 볼 새도 없이 숙소를 찾아야 했다. 결국 물어물어 시 중심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SKY Hotel을 찾았다. 리셉션에서 숙박 요금을 물어보니 24,000프랑(48000원)을 내라고 한다. 15,000프랑으로 해 줄 수 있는지 물으니 그렇게 하라고 한다.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SKY 호텔 지하의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한국에서 가져온 비빔밥 전투 식량을 먹으려 뜨거운 물을 주방에서 받아 나오는데...

헉..

다리가 구멍에 빠졌다.

순식간에 일이라 너무 놀랐지만 일단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구멍에서 뺐다. 빠질 때 다리를 굽히지 않아 큰 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정강이쪽 일부분이 패이고 긁혔다.

  어쩔 줄 모르는 웨이터에게 소독약을 가져 달라고 부탁을 하니 뛰어가서 화장지와 소독약을 가져온다. 냄새가 이상해 소독약 맞는지 물어보니 손소독제라고 답한다. ㅡ.ㅡ

  일단 이런 상처는 이차 간염이 되지 않도록 초동 대처가 중요하다. 만약 여기서 이차 간염이 되면 2주 후에 있을 킬리만자로 등반은 물 건너간다.

  기다릴 것도 없이 호텔 매니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약국을 찾았다. 매니저는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세워(300프랑) 약국에 갈 수 있게 기사에게 설명해 주었다.

  약국에 가니 약사는 병원에 가서 치료 받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밤임에도 다행히 주변 병원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접수를 하니 16000프랑을 내라고 한다. 가져온 돈이 10000프랑인데 만약 안 되면 100$를 거슬러 달라고 이야기 하니, 르완다 돈으로 거슬러도 되는지 묻는다. 내일 르완다를 떠나기 때문에 달러로 달라고 하니 그냥 10000프랑에 치료해 준다고 답한다. 의도하지 않게 병원비도 깎은 셈이네..

  의사선생님는 유쾌한 성격의 청년으로 웃으며 대해줬지만 아무래도 불어를 쓰다 보니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나에게 계속 안티테타믹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일단 치료.. 의사선생님은 칼로 상처 주변의 털을 깎은 다음 거즈에 소독약을 뿌려 상처 부분을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요오드를 바르고 거즈를 붙임으로서 마무리 해준다.

  긁힌 부분은 걱정할 것이 없는데 패인 부분을 신경 써야 한다고 말한다. 패인 부분은 깊지 않음으로 물만 닿지 않으면 나을 수 있을 거라 말한다. 2주 후에 킬리만자로를 등정할 수 있는지 물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유쾌하게 웃는다. 생각보다 깊지 않은 상처에 안도했다.

  그런데 안티테타믹이 뭐지? 대화를 하는 도중 의사 선생님에게 ‘Iron'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아! 파상풍을 이야기네. 우리 나이 때는 이미 예방 주사를 다 맞은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엄마한테 확실히 맞았는지 문자를 보냈다.(다음날 맞았다고 회신)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니 참.. 이번 여행 힘들다.. 카메라 도난, 지갑 분실에 이어 상처에 의한 병원 행까지..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24시간을 두고 일어났다.

  뭐 이렇게 되니 이번 여행에 대한 절망보다는 오기가 생긴다.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꼭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하고 말리라.

  그런 의미에서 여행보다는 안전하게 8일에 다른 멤버들과 합류해 차드 수도인 은자메나로 가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우간다 캄팔라 행 버스는 새벽에 출발하기에 내일 계획한 키갈리 시내 탐방은 포기하고 우간다 캄팔라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제노사이드(대량학살)에 관한 자료는 꼭 보고 싶었는데..

  애초에 일주일 동안 빅토리아 호수 주변 부룬디, 르완다, 우간다 3개국을 육로로 돈 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래도 탐방을 강행 한 것은 지금 아니면 이 나라들을 돌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 목표 중에 하나가 전 세계 모든 나라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틀에서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가끔 사정상 계획이 틀어져 앞으로도 방문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나라가 생기기도 하다.

대표적인 나라가 카자흐스탄이다. 중앙아시아 탐방 때 일정이 틀어져 가지를 못했는데 카자흐스탄 주변 나라는 모두 돌았기(심지어 아프가니스탄도) 때문에 카자흐스탄만 여행하러 일부러 찾아가지 않은 이상 카자흐스탄을 가기는 힘들 것이다. 카자흐스탄 국적의 항공편으로 스톱 오버로 여행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아직은 카자흐스탄 항공편의 노선이 미약하다.

스치듯 지나가지만 그러면서도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를 사전에 공부해 가고 이렇게 여행기에 쓰기에 그 나라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주절이 써 본다.

하루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쉽기는 하지만 르완다와는 내일 이별이다.

내일은 불행이 오지 않겠지? 뭐.. 소득이 있다면 외국에서 처음 병원을 이용했다는 경험 정도가 억지 소득이기는 하다. 더 이상 여행의 마가 끼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