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목)

새벽 5시에 일어나 Niyabugogo 버스터미널로 숙소를 나서니 호텔 직원이 어디를 가는지 물어본다. 직원은 터미널로 간다니까 지나가는 오토바이(500프랑)를 세우더니 기사에게 내가 가는 행선지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버스터미널로 내려가 우간다 캄팔라까지 가는 버스 편을 알아보니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한다. 티켓 오피스에서 티켓을 끊고(7,000프랑) 주변은 아직도 어둠에 깔려 있다. 결국 내 기억 속의 키갈리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집집마다 켜 있는 불빛이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뒤늦게 표를 끊어서 그런지 내 표는 66번인데 차량에는 65번이 끝번호이다. 결국 오피스의 실수로 만석에서 하나 더 끊어 내가 차량을 탈 수 있었지만 덕분에 빈자리를 찾아 세 번 이동해야했다.

키갈리의 제노사이드 기념관(Kigali Memorial)에는 꼭 들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른 멤버랑 안전하게 합류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1994년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탄 여객기가 격추되어 수도 키갈리에 추락했다. 후투족이었던 하비아리마나는 소수인 투치족을 대표하는 혁명 그룹인 르완다 애국전선(RPF)과 평화 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하비아리마나 암살이 투치족의 소행이라고 여긴 대통령 경호 부대가 투치족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고, 끔찍한 인종 학살이 수도에서부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선동을 받은 후투족들은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들을 눈에 띄는 대로 살해했다. 그 결과 약 8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후투족 암살단은 희생자들을 큰 칼로 난도질하거나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뿌리 깊은 반목은 식민지 시대 다수인 후투족을 배제하고 투치족을 대우해주면서 시작이 되었으며 그에 따른 빈부차가 원인이 있었다.

학살이 자행되는 데도 국제사회는 수수방관하였다. 많은 서방국가들은 UN 평화 유지군에 파병하기를 거부했다. 사실 평화 유지군은 소수의 인명 피해가 나자 바로 철수해버렸다. 이후 UN은 휴전협정을 시도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역할을 한정해버렸다.

RPF가 키갈리를 점령하고 후투족인 파스퇴르 비지뭉구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세운 뒤에야 학살은 종료되었다. 투치족 RPF 지도자인 폴 카가메가 부통령이 되었다. 투치족의 보복을 두려워한 200만 명의 후투족은 즉각 탈출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 국가들에 심각한 불안을 야기했다.

현재의 르완다는 키갈리를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인종대학살의 흔적을 씻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1994년 대학살이 일어났던 르완다를 떠올리며 위험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지만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낮은 범죄율과 질서의식을 보여주며 관광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다.

오전 8시 20분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에 도착할 때 차량 승무원이 내 여권을 가져가 그 자리에서 출국 서류를 작성해 준다. 표정이 진지해서 사진을 찍었다.  

국경에서는 시간이 매우 걸렸다. 르완다에서 출국 도장을 받고 우간다에서 트랜짓 비자를 발급해 달라고 하니 7일짜리를 50$를 받고 발급해준다. 트랜짓이 관광비자랑 가격이 같네..

우간다 1$에 2485우간다 실링이다. 우리나라 돈으로는 절반을 생각하면 편하다. 국경에서 물은 800실링이니까 400원 정도, 계란 2개 1000실링이니 500원으로 생각하면 된다.

국경을 떠나서 우간다 수도 캄팔라(Kampala)로 향했다. 산악 지형이 쭉 이어지다가 2시간 정도 달리자 초원 지역이 나온다. 초원 지역은 많은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는데 주로 바나나 농사를 짓는다.  

12시 반에 큰 도시에 도착했을 때 옆 좌석의 사람이 내린다. 창가 쪽 좌석이 내 것이 되어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버스는 계속 달려 2시가 넘자 한 사람이 진지한 표정으로 일어나 승객들을 향해 이야기를 한다. 어디서 기억나는 풍경인데.. 서아프리카 가나에서 인상 깊게 봤던 버스 약장수이다.

캄팔라에는 오수 5시 10분에 도착했다. 원래 9시간이 걸려 오후 3시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여기는 아프리카가 아닌가!

캄팔라는 여느 도시와 달리 엄청난 사람과 차량이 나를 압도한다. 차량은 거의 앞으로 나아가니 못하고 거의 붙어있다시피 있으며 도로를 달리기 보다는 기어 다닌다. 라는 표현이 알맞아 보인다.

캄팔라에 도착하자마자 환전을 했는데 은행 옆에 여행사가 있어 나이로비로 가는 편도 항공을 알아보니 240$~290$선이다. Akamba 버스 오피스에 가서 내일 출발하는 나이로비 행 버스 편을 오후 3시에 출발하고 65000실링에 티켓을 끊었다.

시내는 매우 혼잡하고 공해가 심하기 때문에 시내에서 2km 정도 떨어진 Backpackers Hostel에 오토바이 택시(5000실링)를 이용하여 갔다. 론니에는 캄팔라로 오는 거의 모든 배낭여행자는 Backpackers Hostel로 모인다고 표기 될 정도로 서양 여행자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명성에 걸맞게 많은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미토리는 14,000실링으로 저렴한 편이지만 숙소 안의 레스토랑과 음료는 바깥에 비해 비싼 편이다. 대신 이곳은 와이파이가 되며 무료 인터넷 컴퓨터도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인터넷을 할 수 있었다.

다리 상처에 소독을 하려고 숙소 여직원에게 소독약을 달라고 하니 한 흑인 여성이 다리를 보면서 상태를 관찰한다. 그 흑인 여성은 간호사인데 마침 이곳에 여행을 왔다고 한다. 간호사는 내 다리를 보며 깨끗하게 대처를 잘 해서 덧나지는 않을 거라며 하며 정성스럽게 소독을 해준다.      

내일 오후 3시에 나이로비 행 버스가 출발하기 때문에 오전에는 시내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너무 짧은 시간에 무리하게 욕심을 부린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간다까지 잘 둘러보았다.  


1월 6일(금)

여행 전 조사한 네이버 백과사전과 위키 백과에 의하면 우간다는 에티오피아 방면에서 남하한 인종이 분뇨로·부간다 등의 왕국을 세운 것이 16세기 중엽이었고, 처음에는 분뇨로 왕국이 가장 강력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부간다 왕국이 득세하였다. 1844년경부터 인도양 연안에서 진출해온 아랍 노예상인이 빅토리아호 근처까지 넘나들었고 또한 수단 방면에서 온 노예사냥꾼을 선두로 이집트 세력도 침투해 이 지역을 지배했었다.

영국이 이 지역에 세력을 확립한 것이 1889년으로, 영국 동아프리카회사가 통치·개발을 담당하였다. 1910년경부터 백인 농장에서 시작한 커피 재배가 아프리카인들 사이에도 널리 번져나갔다.

독립활동은 1952년 결성된 ‘우간다 민족회의(UNC)’의 활동이 최초였고, 이는 다른 아프리카 여러 나라보다 매우 뒤늦게 시작된 셈이다. 영국의 ‘동아프리카 연방’구상에 반대했던 부간다 국왕은 1953년 11월 이후 한때 퇴위 당하였으나 1962년 10월 독립되면서 헌법 개정에 의해 특이한 연방체의 대통령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우간다 왕국의 무테사 2세였으나 1966년 총리 M.오보테(Apollo Milton Obote)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좌경화하였다.

이후 오보테는 공포 정치를 펴다가 1971년 부하 이디 아민의 쿠데타로 실각하였고 이디 아민의 오보테보다 더 심한 공포 정치를 폈다. 그러나 아민 역시 1979년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이 이끄는 탄자니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요웨리 무세베니의 혁명군에게 쫓겨났고 1980년 다시 오보테가 돌아와 대통령에 올랐다.

이에 오보테와 무세베니 간의 내전이 발생해 1986년 무세베니가 승리하여 수도 캄팔라에 입성해 대통령이 되면서 우간다는 다시 안정되었다.

우간다는 영어를 공영어로 쓰는 국가로 르완다, 부룬디에 비해서는 여행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수도 캄팔라는 활기차다 못해 지나치게 혼잡하며 공해가 무척 심해 눈에 먼지가 들어올 정도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바로 2001년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수비의 부간다 왕릉군(Kasubi Toms)이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관광객의 방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2010년 3월의 화재로 인해 무지부 아잘라 음팡가가 무너지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카수비 언덕(Kasubi Hill)으로 불리는 구릉 지역 정상 부근에 넓게 자리하고 있으며 1880년 유적의 중심부인 언덕 최정상에는 부간다 왕국의 왕이자 통치자인 ‘카바카(Kabaka)’들의 궁전이 세워졌다. 하지만 몇 년 후 궁전이 있던 자리는 왕실 묘지로 바뀌었다.

무지부 아잘라 음팡가(the Muzibu Azaala Mpanga)’라는 중심 왕릉 건축물에 부간다 왕국의 4명의 선대 카바카인 무테사 1세(Muteesa I, 1835-1884), 바사물라 2세 (Basamula Mwanga II, 1867-1903), 다우디 2세(Daudi Chwa II, 1896-1939), 무테사 2세(Fredrick Walugembe Muteesa II ,1924-1969)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이엉과 풀로 엮어서 만든 돔 형태의 건축물이었으며 높이는 약 7.5m이었다. 2010년 3월 일어난 화재로 완전히 무너졌다.

이곳 왕릉군은 부간다 왕국의 가장 주요한 유적으로 여겨지는데 부간다는 동아프리카에서 19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국가였으며 통치자인 카바카의 막강한 권력 아래에서 바간다(Baganda, Ganda)족은 정교한 중앙집권적 사회체제를 이루었다.

오전 8시 30분에 숙소에서 나올 때 경비를 하는 경찰에게 카수비 왕릉으로 가는 방법을 물어봤더니 경찰은 직접 오토바이를 세워 기사에게 왕릉군에 가는 것을 설명을 한다. 덕분에 편하게 갈 수 있었다.(2000실링)    

왕릉군에 도착해서 한 청년이 입장료를 내라고 한다. 입장료를 내자 청년은 바로 가이드의 표정으로 변신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큰 기대를 안고 왔지만 처음 나를 맞아 준 것은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건물이다. 2010년 화재로 불 타 복원중인데 2년 정도는 더 걸릴 거라고 한다.

대신 우측에 있는 네 명의 왕이 안장되어 있는 건물에 들어가 참배를 할 수 있었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했지만 어둡기 때문에 플래시가 터지지 않는 아이폰으로 찍기에는 무리가 있다.

뒤뜰에는 왕의 자녀들이 묻힌 무덤이 있는데 특히 할 것도 없는 일반 무덤이다. 그리고  람 끝.. 큰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볼 것은 없었다.

왕릉에서 나와 승합버스를 타고(700실링) 시내로 나왔다. 시내 터미널 부근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Mengo Palace로 가기위해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시장이 나온다. 시장에는 곡식, 육류, 과일등 다양한 먹거리와 생필품을 팔고 있는데 활기가 넘친다. 시장을 돌아보면서 흥정도 해보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안전 모드.. 일단 진정하고 혹시 외국인을 노리는 일당이 있을지 몰라 황급히 빠져 나왔다.

Mengo Palace 쪽의 언덕에 다다랐을 때 급한 문자가 수신이 된다. 강원도 교육청의 장학사에게서 온 문자로 2월 1일 강원도정보원에서 열리는 ‘창의인성교육 워크숍’에 우리학교 뮤지컬부 학생들이 강원도를 대표하는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이다. 지난번 로밍 전화가 왔을 때 프로젝트 수행중이라 어렵다고 이야기 했는데 장학사에게 전화를 해보니(비싼 로밍요금 물고 ㅜㅜ) 부담을 갖지 말라며 꼭 공연을 해달라고 하신다.

아무래도 우리 말고는 할 팀이 없나보다. 문제는 연습 시간이다. 뮤지컬부의 공연은 준비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귀국하는 시점이 1월 29일이기 때문에 연습 시간은 30일, 31일 2일 밖에 없다.

숙소는 와이파이가 되어 아이폰으로 카카오톡이 가능하기에 급히 돌아와 아이들에게 공연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와이파이만 되면 아프리카 여행이라도 손쉽게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이들은 모두 공연을 하고 싶다고 대답한다. 지난 12월 21일 정기 공연을 하고 활동을 끝낸 것이 아쉬운 모양이다. 공연을 앞두고서는 일요일 연습에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했던 아이들이기에 믿음이 갔다. 방학 중 틈틈이 연습하고 내가 돌아오고 나서 2일 열심히 연습하기로 했다.

문화예술교육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의논하고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장학사에게 OK 문자를 보내고 나니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 레스토랑에서 콜라 하나를 시켜 와이파이를 사용해 컴퓨터로 뉴스와 여행 정보를 체크했다.  

이곳 아프리카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해 은행 업무까지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노트북이나 넷북은 여행의 필수품이 되었다.  

오후 2시 반에 아캄바 버스 터미널로 가니 3시 버스가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고 한다. 결국 1시간이 훌쩍 넘은 오후 4시 20분에 출발했다. 이번 버스만 타면 후배 교사들과 합류해 차드 호수로 가게 되었다는 기분에 들떠 있었다.

버스는 시내를 빠져 나오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답답하기 보다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는 느낌이다.  

석양이 질 무렵 버스는 진자(Jinja)의 큰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는 이 강이 빅토리아 호수로부터 이어지는 나일강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진자에서 2시간을 달리고서 우간다-케냐 국경에 도착했다. 이 때 팔이 벌레에게 물려 온통 간지러웠지만 일단 참고 샀다.

케냐 측 이민국에서 케냐비자를 보여주니 추가로 비자를 받지 않고 스탬프를 찍어준다. 33개월 단수비자이지만 그 기간 안에서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대사관 직원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50달러를 더 안 쓰게 되어 돈을 번 기분이다.

나이로비-음완자 구간에 이어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받는 오버 나이트(Over Nigh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