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월)

위키 백과와 외교부 주카메룬대사관(차드 겸임) 자료를 토대로 차드 역사를 정리해 보았다.  

차드의 Borkou에서 발견된 인골은 300만년 이상 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고대에는 사하라 지역이 완전한 불모지는 아니었다. 2500년전에 챠드호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기후는 더 습했고 야생동물도 풍부했다. 예를 들어 7000년 전 현 사하라 지역인 중북부 분지는 아직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사람들이 물가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음. Borkou와 Ennedi에 있는 절벽 벽화에는 코끼리, 코뿔소, 기린, 소와 낙타 등이 묘사되어 있지만 지금은 낙타만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다. 1984년의 가뭄이후 호수가 급격히 말라가면서 예전에 호수와 그 해변이던 지역이 사막으로 변하면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화석과 사냥꾼이 새긴 암석화를 발견하고 있다.

차드는 지형적인 특성상 사막 및 사바나 지역의 북아프리카와 열대우림 지역의 Bantu 종족 간의 교차로 역할을 했다. BC 7세기부터 정주민들이 대거 차드 분지에 유입되기 시작하였음. BC 1세기말 여러 국가와 제국이 이 지역을 통과하는 사하라 횡단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이곳에서 각축을 벌인다.

사오(Sao)족은 수천 년 간 Chari 강 유역에서 살았으며 그들의 약육강식에 의해 강한 종족이 약한 종족을 눌렀으며, 이들 강한 종족은 나중에 Kanem-Bornu와 Baguirmi 왕국을 세웠다. 이 두 개의 왕국과 Ouaddai왕국은 오늘날의 차드의 대부분과 심지어 나이지리아 및 수단까지 지배했다.

300년 동안 지중해와 나일강에서 상인들이 가져온 소금, 노예, 구리, 황금 무역이 증가하게 된다.1200년까지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된다. 카넴 왕국은 노예를 배후로 하여 확장하면서 카넴-보르누(Kanem-Bornu)로 알려지게 되고 17세기까지 '왕국'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1812년 카넴왕국은 풀라니(Fulani)족이 수도를 습격했을 때 무너지게 된다. 그와 동시에 두 개의 다른 노예무역 아랍왕국이 일어나면서 무역루트를 장악하고 노예로 잡기 위해 남부사람들을 생포하게 된다.

회교도는 남부 흑인을 20세기 초까지 노예로 생포하였으며 말과 같은 가격으로 팔리기도 하였다. 5명중 1명의 노예가 회교도의 무역지역으로 가는 도중에 추위, 배고픔, 굶주림, 질병으로 죽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대우는 혹독했다.

프랑스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식민 정책을 내세워 19세기말에 챠드를 지배했을 때 회교도에게 괴로움을 겪고 있던 남부인들은 환영을 했다. 프랑스는 1891년 주로 무슬림왕국에 대한 군사원정을 통해 그들의 근거지를 마련하였고 프랑스와 차드 간 본격적인 전투는 1900년 프랑스 Lamy 소령과 아프리카 지도자 Rabah 간에 벌어졌으며, 프랑스는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1911년에 서야 차드 영토가 평정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식민군대와 차드 무장세력 간의 무장충돌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프랑스인이 통치를 시작했지만 항구에서도 멀고 별다른 자원이 없는 열악한 환경인 차드를 아프리카의 프랑스령에서 있는 모든 식민지 중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으로 남겨두게 된다.

프랑스는 면화농장을 세우고 인두세와 쿼터를 부과하면서 비옥한 남부지역을 수탈하면서 그나마 남부에서 남아 있었던 식민지에 대한 지지를 잃게 된다.

1960년에 독립을 하게 되자 프랑스로부터 우대를 받았던 남부인들이 차드를 통치한다.  당연히 흑인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간주하던 북부인과 심한 마찰을 일으키게 되며 오랜 세월 동안 내전과 쿠데타에 시달리게 된다.

독립은 차드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나약한 시기에 이루어지며 1960년대 말부터 주기적으로 일어나던 가뭄의 시작과 함께 모든 것이 더 나빠지게 된다. 그리고 곧 국민의 동요가 내전으로 바뀌게 된다. 흑인 아프리카인 정부는 야당을 금지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한다. 반란이 속출한다. 그리고 더 많은 살인이 뒤따라 일어난다.

1968년 프랑스군이 정부군과 프롤리나트(Frolinat)라고 불리는 게릴라군과의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차드에 들어오게 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1971년 리비아가 반란군에 군대를 지원하면서 전쟁에 끼어들게 된다. 정부는 정치범을 풀어줌으로써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시도하게 된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아우주 국경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한다면 게릴라지원을 그만둘 것이라는 제안을 했고 차드 정부는 이를 받아들인다. 차드의 지도자인 톰발바예(Tombalbaye)는 동의했지만 그 후 그는 광적인 통치로 국가를 공포로 도가니로 만든다. 부두교의 광란과 민족주의적인 열정으로 톰발바예는 전 국민을 전통적인 아프리카인으로 변화시키고 시민서비스와 군대가 톰발바예 자신의 부족의 욘도(yondo) 개시의식을 시행하게 된다.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톰발바예는 1975년 군사쿠데타로 암살되었고 이때부터 모든 것은 더 복잡하게 된다. 가다피는 프롤리나트에 대한 군대지원을 다시 시작했지만 프롤리나트 조직은 내분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사분오열된 집단이 아랍반란군사이에 형성되며 그중 한 집단을 히센 하브레가 이끌게 된다. 그는 프롤리나트에서 추방되었으며 500명의 강한 군대와 같이 전투를 계속하게 된다.

11개 파벌 간의 내전이 너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어서 중앙정부는 거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내전 종식을 지원하기 위해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이 개입하였다.   처음에는 나이지리아와 그 후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주선에 의해 개최된 4차례의 국제회의는 우선 차드의 분파를 한 군데 불러 모으는 것을 시도했으며 1979년 8월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개최된 제4차 회의에서 Lagos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총선을 앞두고 과도정부를 설립했으며 1979년 11월 국가연합과도정부(GUNT)가 18개월 동안 통치할 위임을 받고 창설되었다. 북부 출신 Goukouni Oueddei가 대통령에, 남부 출신 Colonel Kamougue가 부통령에, Hissein Habré가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안정을 시도했으나 연립정부는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1980년 1월 Goukouni와 Habré 군대 간의 전투가 재개되었다. Goukouni는 1980년 말까지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 수도와 기타 도시 지역을 다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1월 Goukouni가 차드와 리비아가 완전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작업을 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에 대해 심한 국제적 압력을 불러 왔으며 Goukouni는 결국 모든 외국 군대가 차드로부터 완전히 철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리비아 군의 일부가 북부로 철수함으로써 Habré 군대가 1981년 6월 은자메나 진입을 하였다. 프랑스군과 3,500명의 나이지리아, 세네갈, 자이레 군으로 구성된 OAU 평화유지군은 분쟁 기간 중 중립을 유지하였다. Habré는 계속해서 여러 전선에서 무장 저항에 직면했으며 통치하는 동안 정적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 학살하고 고문하였다.

1983년 여름 GUNT 병력은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 동북부 차드에 있는 정부군 주둔지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음. 리비아의 직접적인 개입에 대응하여 프랑스와 자이레군은 Habré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여 리비아군과 반군 세력을 북위 16도 이북 지역으로 몰아내었다.  

1984년 9월 프랑스와 리비아 정부는 자국 병력을 차드에서 동시에 철수하는 데 합의하였다고 발표했다. 1984년말까지 프랑스와 자이레는 자국 병력을 철수하였으나, 리비아는 협정을 준수하지 않고 차드의 ⅓에 해당하는 북부 지역을 계속 점령하였다.  남부 차드에 근거지를 둔 남부반군특공대그룹(CODO)은 정부의 학살에 의해 와해되었고 1985년 Habré는 차드민주전서(Chadian Democratic Front), 민주혁명평의회의 조정행동위원회(Coordinating Action Committee of the Democratic Revolutionary Council) 등 일부 가장 강력한 적과 잠시 화해했다. Goukouni 또한 Habré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Goukouni의 지원을 받아 Habré는 리비아군을 차드 영토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몰아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차드와 리비아 간의 휴전과 그 후 몇 년간에 걸친 협상 결과 1994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Aouzou strip에 대한 차드의 주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리비아의 차드 점령에 종지부를 찍었다.  

1990년 12월 리비아가 지원하고 차드 주둔 프랑스군도 반대하지 않는 가운데 Déby의 병력은 성공적으로 은자메나에 진군하였다. 3개월간의 임시정부 통치가 끝난 후 1992.2.28. Déby의 애국적구국운동(Patriotic Salvation Movement: MPS)은 Déby를 대통령으로 하는 국가헌장을 승인하였다. 그 후 2년 동안 Déby 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가 적어도 2차례 있었고 정부군은 민주주의와 개발을 위한 운동(MDD),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부흥위원회(CSNPD), 차드국민전선(FNT), 서부군(FAO)을 비롯한 반군 세력과 차드호와 남부지역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보다 앞서 전국회의를 소집하라는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다원화된 민주정권 창설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정당(1992년 합법화), 정부, 노조, 군부의 대표 750명이 회의를 했지만 이후에도 남부 차드에서 대규모의 민간인이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정치적 불안은 계속되었다. 1994년 Kette Moise와 여타 남부 그룹이 이끄는 CSNPD는 정부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나 곧 와해되었다.  Kette의 전 동료 Laokein Barde와 재생을 위한 민주전선(Democratic Front for Renewal: FDR)이 이끄는 연방공화국을 위한 군대(Armed Forces for a Federal Republic: FARF), 그리고 재조정된 MDD 등 2개의 새로운 그룹은 1994-95년 기간 중 정부군과 격돌했다.  

1996년 초 정적들과의 교섭이 원만히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Déby는 6월중 대통령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밝혔고, Déby는 차드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선거에서 2차투표시 야당지도자 Kebzabo의 지원을 얻어 Kamougue 장군(1975년 쿠데타 주모자)를 패배시키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여당(MPS)은 1997년 1월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체 125석 가운데 63석을 차지하였지만 국제선거감시단은 차드의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수많은 심각한 선거부정 사례가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혼탁했다.  

1997년 중반까지 정부는 FARF 및 MDD 지도부와 평화안을 타결하여 반군들을 중앙아프리카 및 카메룬에 있는 후방기지와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고, 1997년 10월 「차드국민전선(FNT)」 및 「사회정의 및 민주주의운동(Movement for Social Justice and Democracy)」 소속 반군과의 협정도 아울러 타결되었다. 그러나 FARF 반군이 정부군과 충돌하여 마침내 1998년 1월 정부군에 항복함에 따라 평화가 왔지만 오래지 않아 다른 남부 출신 민간인 다수가 전투 중에 피살된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차드운동(Chadian Movement for Justice and Democracy: MDJT)」 소속 반군은 간헐적으로 북쪽의 Tibesti 지역에 활동하며 이곳에 주둔한 정부군을 습격하여 수백명의 민간인, 정부군 및 반군의 인명이 살상되었다. 2003년 정부와의 협정에 따라 수백 명의 반군이 차드군에 재편입되었음. MDJT의 잔류 병력이 Tibesti 지역에서 계속 활동했으나, 차드의 다른 지역에서는 적극적인 반군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2001년 5월 Déby는 국회의원 선거가 2002년 봄으로 연기된 후 실시된 대통령 선거 1차투표에서 63%를 득표하여 당선되었지만 선거 과정에서 6명의 야당 지도자들이 2차례에 걸쳐 체포되었으며, 1명의 야당인사는 선거결과가 발표된 후 살해되었다.

야당과 노조는 정부 부패, Zaghawa족 편애, 보안군의 직권남용 등을 주장하며 총파업과 반정부 시위를 이끌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2004년 5월 국회는 Déby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수 있게 허용하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으며 2005년 6월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어 대통령의 임기제한은 철폐되었다.

Déby는 적어도 3차례의 쿠데타에 직면하였고, 2006년 4월 Tama 종족그룹이 이끄는 민주적변화를 위한 연합전선(United Front for Democratic Change)이 Déby 대통령이 속한 Zaghawa 종족 그룹 출신 차드 반군조직과의 함께 수도 은자메나(N'Djamena)를 공격하였으나 정부는 공격을 저지하였다. 2006년 Déby는 야당이 보이콧한 가운데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절대 다수를 득표하여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반군은 그들 그룹 사이의 전투가 빈번하여 지리멸렬 되었으며 2007년 10월 4개 반군 그룹과 차드 정부 간의 평화협정이 서명되었다.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의 주선으로 리비아의 Sirte에서 협상이 열렸다. 2008년 2월에도 반군이 수도 N'Djamena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으며 그러한 불안이 지금도 이어져 있다.

차드의 역사를 살펴보니 수천년 동안 남부와 북부의 반목이 심하며 프랑스와 리비아와 같은 외세의 개입으로 최근까지도 내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Déby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과 출신 종족을 우대를 하고 있으며 20년간 통치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러 곳에 국경분쟁지역이 있다. 인권단체는 비공식적으로 경찰이 범죄자를 때려죽이는 정책을 비난하고 수많은 실종된 사람과 즉결처형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차드는 역사적으로는 극히 드문 안정기이다.

차드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51%이고 그리스도교가 35%, 정령신앙이 7%이다. 주민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는 중·북부 또는 동부의 수단계 주민이며 남부의 반투계 주민은 고유의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25%) 그리스도교도(25%)들이다.

오전 7시 지부장님이 오셔서 바게트와 계란 매실차로 아침을 먹고 굿네이버스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로 오는 길에 은자메나 시내를 볼 수 있었는데 고층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집들은 흙벽돌로 만든 전형적인 사막의 도시이다. 예전에 니제르를 여행했을 때 보았던 아가데즈와 비슷한 풍경이다.

굿네이버스는 차드 지부는 한국인 직원은 2명이 상주해 있고, 현지 직원은 35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지 직원은 35명을 채용했는데 보수가 높아서 2명을 뽑는데 300명이 응시할 정도이다. 차드 현지 교민은 25명인데 은자메나에 2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2명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12배나 되는 나라 전체에 교민이 25명인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오지이긴 정말 오지인가보다.

굿네이버스 사무실에서 지부장님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의논을 했다. 지부장님은 우리에게 프로젝트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일정인 차드 호수 탐방을 위한 차량을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으며 굿네이버스 직원 중에 한명이 우리가 방문할 Mao 출신이기에 같이 동행시켜 주신다고 하신다. 차드 호수로의 출발은 이틀 뒤로 확정했으며 내일은 근처 초등학교에서 우리가 준비해 온 미술 연구수업을 하기로 일정을 확정했다. 이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한참 은자메나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일정을 확정하고 가장 먼저 할 것이 환전이다. 사무실에서 나와 굿네이버스 차량을 타고 한인교회로 가는데 대통령궁과 인민 광장이 나온다. 인민광장은 북한에서 지었다고 하는데 멋드러진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대통령궁과 인민광장은 사진을 찍으면 무장한 군인이 총격을 가하거나 경찰서에 연행되어 간다고 한다. 은자메나에서는 절대 사진 찍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 하신다. 삼엄한 분위기가 이곳이 아직 완전한 평화가 오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한인교회는 차드 한인 회장이신 이시영 회장님 댁이다. 23년을 사진관을 열며 거주하고 계신 이시영 회장님은 이곳에서 꽤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으셔 이곳 한인들이 회장님을 통해 환전을 한다. 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사모님이 대신 환전을 해 주신다. 사모님은 유로화가 있는지 물으시는데.. 아차.. 지난 서아프리카의 교훈을 잊었다. 이곳은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세파프랑을 쓰는데 유로화와 고정이 되어 있기에 달러화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 서아프리카 여행에서도 환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다행히 회장님이 좋은 환율로 쳐주셔서 1$에 500세파프랑(앞으로 CFE로 표기)으로 환율을 쳐주셨다. 5년 전 서아프리카 여행에서는 420CFE이었는데 달러화가 많이 올랐다.          

은자메나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이 일요일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차드 호수를 갔다 온 후 이번주 일요일에 이곳을 방문하기해서 한인들을 뵙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차량이 덜덜거리면서 한쪽으로 기운다. 세우고 보니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지부장님이 직접 수리를 하시는데 지나가는 행인이 다가와 타이어 교체를 돕는다. 타이어를 교체할 때 한국 사람이 다가와 인사를 하는데 수녀님으로 이곳에 4개월 동안 머물고 계신다며 앞으로 장기 거주를 할 거라고 하신다.

타이어 수리가 끝나고 도와준 행인에게 팁은 준 후 다시 사무실로 가는데 이번에는 기름이 다 떨어져 차량이 멈춘다. 원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했으나 수급이 원활치 않아 은자메나 시내 모든 주유소가 기름이 없는 상태이다.  

직원에게 전화를 해 차량을 바꿔 타고 사무실로 갔다가 지부장님댁으로 갔다. 댁에는 한동대 연구원과 대학생들이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처럼만에 방문한 한국인들을 위해 사모님께서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메뉴는 비빔밥과 미역국! 은자메나에서 먹는 한국 음식의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한인 식당이 존재하지 않는 사막 한 가운데서 먹는 비빔밥이다.

박근선 지부장님은 대학생 때 아프리카 배낭여행을 하다가 그 당시 르완다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르완다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셨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영국 맨체스터에서 자동차 정비를 공부하셨다. 이유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고등학생 때까지 사이클 선수로 활동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는 꽤 강하며 영어, 불어, 아랍어 3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신다. 지부장님은 자부심을 가지고 평생을 봉사를 위해 이곳에서 지내실 거라고 하신다.

지부장님은 너무 바빠 사무실로 가시고 사모님은 락차드(Lac Chad로 차드 호수라는 뜻)로 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신다. 락차드는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 중에 가본 사람이 거의 없으며 지부장만 근처까지 갔다 왔을 정도로 소외지역이다. 당연히 여행자는 존재하지 않을 지역이다. 현재 그곳은 모기가 많이 있어 반드시 모기장을 소지해야 한다고 한다. 숙소는 잘 알려진 곳이 없어 현지에서 섭외 할 수밖에 없다. 뚜렷한 정보가 없지만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기에 오지 여행자 입장에서는 구미가 땡긴다. 과연 어떤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김효숙 선교사님이 차드 호수 탐방에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도록 동행하셨다. 선교사는 차드가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도시이지만 21세기는 없다고 정의한다. 차창 밖 거리를 보면 그 말이 맞음을 느낄 수 있다. 차드에 1년 계획으로 왔지만 앞으로 장기로 연장할거라고 한다. 처음 차드에 왔을 때는 힘들고 외로웠지만 이곳의 매력이 마트에 가서 통조림과 식료품 가격을 알아보는데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너무 비싸다. 모든 공산품을 프랑스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두배 이상의 가격이다.

결국 한국에서 가져 온 식량을 최대한 활용하고 현지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만 물은 넉넉하게 샀다.

지도를 사기 위해 서점에 들렀는데 원주의 동네 서점만한 이곳이 차드에서 가장 큰 서점이다. 지도(12500CFE)와 엽서(장당 500CFE)를 샀다. 특히 지도는 크기가 커 차드 호수 탐방에 요긴하게 쓸 것은 물론 한국에 돌아와서 호수 지역을 표기하는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요즘말로 득템했다.

숙소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지부장이 오셔서 모레 락차드로 갈 직원과 차량을 소개해 주셨다. 차량은 도요타 차량으로 기사는 사막 운전 경험이 많다. 지부장님의 도움으로 기름값을 포함한 모든 제반 비용으로 하루에 10,000CFE로 합의를 봐주셨다. 락차드는 4일을 계획했으니까 40,000CFE으로 92만원 정도이다. 지부장은 더 싼 차가 있기는 하지만 안전이 우선이기에 가다가 멈추지 않는 새 차를 섭외했다고 하신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저녁식사로 라면을 먹고 나서 상걸이와 재용이는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오후 8시인데..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4시~ 시차적응이 안 된 당연한 결과이다.

내일은 현지 초등학교에서 연구수업을 하는 날이다. 이곳의 아이들과의 만남으로 설렌다.    


1월 10일(화)

일어나니 상걸이와 재용이가 수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일찍 자는 바람에 새벽 1시에 일어나 준비했다고 한다.

아침 식사는 한국에서 가져 온 스프를 먹고 여행기를 정리하는데 굿네이버스의 고윤정 커뮤니케이터가 현지 직원 2명과 함께 왔다. 현지 직원은 한명은 통역, 한명은 운전기사이다.

학교로 가는 길에 은자메나 시외를 볼 수 있었는데 강가의 흙집과 낙타를 타고 다니는 유목민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수업할 학교는 은자메나에서 7Km 떨어진 칼리와 초등학교이다. 굿네이버스에서 주민들과 함께 지은 학교로 150명의 학생이 3개 반에 나눠 수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서로 악수를 하려고 손을 뻗친다.

수업 대상은 2학년인데 말이 2학년이지 덩치는 5~6학년 정도 되 보인다. 고윤정 대리는 학교가 생긴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뒤 늦게 학교에 들어 온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오늘 수업자는 상걸이, 나는 촬영, 재용이는 보조교사를 맡았다. 상걸이가 우리말로 설명을 하면 고윤정 대리가 영어로, 스텝이 현지어로 통역을 해준다. 아이들에게 모둠을 구성하게 하고 한국에서 가져 온 사인펜과 색연필을 나눠주었다.

상걸이가 지구 온난화와 관련 된 차드 호수가 줄어듦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생활 모습에 대해 그려보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사인펜, 색연필을 사용해 본 적이 없고, 더구나 미술 수업은 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이곳 아이들은 글 쓰는 것도 못하기 때문에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는 지부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수업을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일단 사인펜과 색연필 사용법을 알려준 후 선생님들이 붙어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보도록 유도를 해도 여전히 정지 상태이다.

한명이 용기내서 색연필을 들고 나서야 나머지 학생들도 따라한다. 이곳은 어촌 지역이라 주로 항아리, 물고기, 집, 절구, 차 등을 그렸는데 자신이 없어서 그런지 크기를 작게 그린다. 고윤정 대리는 이렇게 좋은 종이를 사용하는 것도 처음일 거라고 이야기한다.

이 학교는 그나마 책상 의자가 있어서 좋은 화경이지만 다른 학교는 건물, 칠판도 없이 움막 흙바닥에서 공부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미술 수업이 처음이라 처음에는 낯설어 했지만 나중에는 재미있게 웃으며 그림을 그렸다. 미술 수업 말미에는 학생 세 명이 나와 발표를 했는데 서로 발표를 하고 싶다고 손을 든다.

미술 수업이 끝나고 재용이가 한국 전통 민속놀이인 제기차기와 팽이치기를 수업했다. 25명씩 나눠 코너를 운영했는데 나는 제기차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잘 차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놀이에 신나는 표정이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마무리 발언은 내가 했다.

‘여러분처럼 착하고 열심히 하는 학생은 선생님들은 평생 기억할 거예요. 모두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차드를 이끄는 훌륭한 어른으로 자랐으면 해요. 한국도 50년 전만해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지만 열심히 공부를 해서 지금은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어요. 여러분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다른 나라 학생에게 설 수 있는 날이 꼭 오기를 바래요.’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아이들 모두에게 페이스페인팅을 해 주었다.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처음일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의 그림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수업 중간에 학교 옆에 있는 우물에 가보았다. 굿네이버스에서는 마을 단위로 우물 100개를 파주었고, 올해도 100개를 더 팔거라고 한다. 우물이 생기면 마을 하나가 혜택을 본다. 이렇듯 한국적인 NGO인 굿네이버스는 이곳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떠날 때 아이들은 차 뒤를 쫓아오며 인사를 한다. 돌아가는 길에 마을 집에 들러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잠깐 둘러 본 후 로 은자메나 돌아왔다.

사모님이 오늘도 점심을 대접해 주소 싶다고 약속을 잡아 놓으셨다. 고윤정 대리는 시간이 남는다며 은자메나 시장으로 구경을 갔다. 차드에서 가장 큰 바자르답게 사람들로 바글바글거린다. 시내는 카메라 촬영에 민감하기에 스마트 폰으로 조심스럽게 촬영했다.

차드호 탐방에 필요할 식량과 건전지를 샀다. 어제 마트보다는 저렴하지만 이곳 물가도 결코 싸지는 않다. 고윤정 대리는 차드에서는 거의 모든 물건을 수입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서아프리카의 카메룬까지는 컨테이너 한 대에 3000불이면 오지만 카메룬에서 은자메나까지 트럭 수송하는데 세금까지 2000만원을 줘야 한다고 한다. 결국 내륙국이기에 겪어야 할 애환을 이곳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야 스쳐지나가는 외국인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고통이리라.

은자메나로 돌아와 사무실에 들렀다가 시장에 가서 먹을 바케트와 스파게티면을 사고 과일 종류를 샀다. 바게트 빵은 12개에 500CFE로 이곳 물가에 비해 저렴하다. 시장에서 촬영을 하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에 민감하기 때문에 군인들의 눈을 피해 스마트폰으로 몰래 촬영을 했다.

지부장님댁에 가니 사모님이 비빔면과 불고기, 양배추 김치와 밥을 준비해 놓으셨다. 사모님은 어제 라면을 잘 받았다며 어제 맛이 궁굼했던 꼬꼬면을 드셨다고 한다. 꼭 보답을 하고 싶어 초대하셨다고 하신다. 차드에 들어올 때 한인들에게 필요한 짐을 들고 들어갔는데 이것이 이분들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하신다. 때문에 떠나기 전 메일로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거나 계신 분들의 가족들로부터 짐을 받았다. 차드는 워낙 알려지지 않은 오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문객은 한 해에 5명 정도인데 올해는 한동대 4명, 우리 3명으로 1월에 한해 방문객을 초과했다고 말하신다. 최근에서야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탤런트 박용하가 세운 요나스쿨과 그의 뜻은 이은 가수 이승철의 선행이 방송을 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부장님은 건물과 같은 하드웨어는 굿네이버스에서 지원해 줄 수 있지만 학생들에게 가르칠 소프트웨어가 절대 부족하다고 말하신다. 한국의 교사들이 방학 기간을 이용해 이곳으로 와 현지 교사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신다. 물질적 후원보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는 활동을 강조하셨다. 혹시 한국의 교사 중에 방학 기간에 이곳에서 봉사하실 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숙식을 제공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사모님은 락차드로 가는 우리가 매우 걱정스러우신 표정이다. 사모님은 얼마전 무장 강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라며 우리의 안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신다. 또 우리에게 필요한 모기장과 정수약, 빈물통, 침낭을 챙겨주셨다.  우리가 탐사할 차드 호수 지역. 즉 락차드는(Lac Chad)는 이곳에 살고 있는 한인들도 가본 분이 지부장님밖에 없을 정도로 오지이다. 교민들은 갑작스럽게 세 명의 교사가 락차드 지역으로 간다고 하니 걱정이 많이 되신 듯 하다.

숙소로 돌아와 카메라, 캠코더, 노트북, 휴대폰 모두를 충전했다. 락차드 지역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숙소에서 모두 충전을 해야 한다. 다행히 콘센트가 많아 모두 충전할 수 있었다.    

지부장님에게 케냐 항공권의 스케줄 일정 변경을 부탁드렸다. 원래 차드에 18일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나이로비에서 주케냐 대사관 직원과 UNEP 방문이 갑작스럽게 잡히는 바람에 차드에서의 일정을 줄이게 되었다. 지부장님은 걱정말라며 처리해 주신다고 말하시며 굿네이버스 직인이 찍힌 서류를 주신다. 이걸 가이드에게 맡기면 여권이 없어도 여행하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하신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  

  은자메나는 차드의 중심도시로 차드에서는 가장 현대화 된 대도시이지만 사람들의 복장은 옛 모습 그대로이고, 차량들 사이로 낙타, 당나귀를 타거나 짐을 옮기는 모습이 보이는 과거로 돌아 온 풍경이다. 이곳은 19세기와 20세기가 공존하는 도시.. 이제 막 내전이라는 암흑세계를 마치고 동이 트기 전 새벽의 모습..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 온 느낌이다. 분명한건 지금 이런 풍경이 오래지 않은 미래에는 개발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쓸려 내려갈 것이다.  

이제 우리의 큰 목표인 차드호 탐사를 떠난다. 은자메나를 떠나면 더 오랜 과거의 풍경으로 향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