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이 6시 50분인데 혹시 7시까지 독일인 여행자들이 오지 않으면 곧장 프란시스타운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6시 45분 경 독일인 여행자 6명이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아준다. 그들은 내가 연락되지 않았지만 올 줄 알았다며 어서 사무실로 가자고 한다. 사무실에서는 항공권 발권을 했다.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이지만 비행기 타는 수속은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여느 비행기와 똑같다.

비행장에 들어서 비행기를 타려고 하니 흑인 기장은 1시간 동안 오카방코 델타 전체를 둘러 본다며, 설명을 해 준다. 프로펠러 비행기를 보니 참 작다. 이게 과연 잘 뜰까?

비행기에 탑승하고 이륙을 한다. 작은 비행기라 흔들거림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프로펠러 비행기를 탔다는 신남이 더 앞섰다. 하늘로 뜨고 저공비행을 시작했다. 바로 차창으로는 마운 시내가 보이더니 있다가 버펄로 펜스가 보이고 오카방코 델타가 보인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아침의 오카방코 델타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이다. 오카방코 델타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안개와 마주쳤다. 저공비행인데도 밑이 보이지 않는다. 대지가 드라이아이스에 묻힌 풍경이다. 이러다 안개만 보는 것 아니야? 다행히 5분 정도 날자 안개가 걷힌 지역이 나타난다.

저공비행이지만 동물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독일인 여행자는 간혹 코끼리가 보인다며 소리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델타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물줄기와 섬이 이어지고 있으며 아침 햇살에 델타의 모습이 반짝거리는 풍경이다. 연신 사진기 셔텨를 누르며 이 감동을 사진에 담으려고 애 썼다.

간혹 하마와 코끼리가 보이는데 카메라에 담는 것이 쉽지 않다. 비행기 속도가 빨라 금새 지나치며 크기도 작기 때문에 줌을 빠르게 동작해 포착하기는 쉽지 않다. 이래서 항공 촬영이 어렵다는 것을 체험했다. 다행히 비행 막판에 기린 6마리를 사진기에 포착할 수 있었다. 아쉽게 한 시간이 금새 지나갔다. 비행기로 델타를 돌아보는 것은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말로 감동스러운 경험이다. 어제 모코로 투어보다 훨씬 낫다. 독일 여행자는 자신들도 모코로 투어 하면서 동물을 한 마리도 못 봤다고 한다.

비행이 끝나고 비행기 사무실에서 정산을 하는데 1인당 488풀라가 나왔다. 비행기가 한번 뜨는데 3400풀라가 약간 넘기 때문에 인원을 7명을 채우면 가능한 금액이다. 총 80$가 안 넘는다.

마침 지갑에 딱 480풀라가 있었다. 독일 여행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다시 ATM에서 200풀라를 인출했다. 이것보다 더 쓰지는 않겠지..

이제 마운에서의 일정은 끝났고 짐바브웨를 향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에서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가 프란시스코 타운 가는 버스 편을 총 90풀라(89풀라+1(짐칸))에 끊었다. 론니플래닛의 가격보다 훨씬 비싸 의심을 했지만 영수증을 끊어주고 옆의 할아버지도 같은 가격을 내는 것을 보고 단지 물가가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버스는 완전히 꽉 찼다. 자리가 없어 운전석 옆의 엔진 덮개 위에 앉았다. 이곳에서는 대중 교통편이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버스를 타려고 하고 좌석은 물론 복도까지 꽉 찬 형태이다. 마운에서 490Km를 가는 동안 버스는 사람은 오르내리려 정차를 많이 했고, 도로의 가축 때문에 정차를 많이 해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리는데 밥과 반찬을 팔고 있었다. 오랜만에 밥맛을 볼 수 있었다.

오후 3시에 프란시스코 타운에 도착했다. 볼거리가 없는 도시이기 때문에 곧바로 짐바브웨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국경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운전사는 요금이 20풀라고 말하며 티켓을 끊으라고 한다.

티켓 끊는 청년에게 가니 30풀라를 내라고 한다. 외국인이라고 바가지 씌우지 말라고 하니 요금 20풀라에 짐표 20풀라 총 40풀라를 내라고 한다. 보츠와나의 마지막 인상을 이 청년이 더럽히네..

버스는 꼭 터미널에서 타지 않아도 된다. 짐바브웨로 가는 길목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슈퍼에 들려 우유와 음료를 샀다.

짐바브웨로 가는 길목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차량을 히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히치는 여행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량이 없는 사람이 일정 금액을 주고 같이 쉐어(나눠 타는 것)를 하는 형태이다. 때문에 지나가는 차량을 잡는 것이 특이하지 않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바로 옆에는 도로 공사가 한창인데 중국인 기술자가 쉬는 시간인 듯 쉬면서 신기하게 나를 쳐다본다. 머나먼 타국 땅까지 와서 일을 하는 중국인 인부들을 보니 예전에 낯선 중동으로 돈벌이를 나선 한국 기술자들이 떠올랐다. 그 기술자들 덕분에 지금의 한국 경제의 밑천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지금 내가 여행할 수 있는 경제적 발전의 토대가 되지 않았는가.. 중국 인부들도 많은 돈을 벌어 올 것을 기대하는 가족들이 있겠지?

국경으로 가는 차량을 잡으며 중국 인부에게 ‘워스 한궈런. 짜요(난 한국인이에요. 힘내요)’라고 말하고 악수를 청했다. 타국에서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국경으로 가는 버스도 사람들로 꽉 차 복잡했다. 버스 안에서는 한 청년과 아줌마가 종교를 주제로 논쟁중인데 한창을 이야기해도 풀리지 않고 언성이 높아간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도 말다툼은 계속되고.. 역시 종교 문제는 민감하다.

오후 6시 보츠와나 국경에 도착했다. 출국 스탬프를 찍으려고 하는데 직원이 왜 보츠와나 비자가 없는지 묻는다. 한국인이 무비자인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짜증은 났지만 한국인 무비자 여부를 확인 한 후 출국 스탬프를 찍었다.

여기서 짐바브웨 국경까지는 2Km 정도 되는데 아까 타고 온 버스에서 짐바브웨 국경까지 태워다 줬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여권의 비자페이지이다. 잠비아, 말라위와 같은 국가에서는 페이지가 어느 정도 없으면 비자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2006년 지금 여권을 발급 받을 때 설마 이 많은 페이지가 채워질까? 가볍게 웃어 넘겼지만 이게 현실이 되고 여행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좀 거슬린다.

하지만 덕분에 여행 일정이 정리 되었다. 여행 시작 시에도 오카방코 델타에서 빅토리아 폭포를 들리고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나중에 들릴지, 아니면 그레이트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순으로 갈지 정하지 못했다. 거리로 따지면 전자가 좋지만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2번씩 방문해야 하기에 비자 페이지를 생각해 국경 넘는 것을 간소하게 하는쪽으로 일정을 잡았다.

일단 짐바브웨부터는 비자페이지 관리를 하기로 했다. 다행히 이민국 직원이 친절해 내가 지정한 페이지에 비자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잠깐 남직원 한명이 내가 북한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해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기는 했지만..

비자를 받고(30$) 입국 스탬프를 받은 후 블라와요행 버스를 타려는데 프란시스타운에서 잠깐 이야기 했던 아줌마와 다시 만났다. 아줌마는 짐바브웨에서는 절대 배낭이나 가방 도둑을 조심해야 한다며 절대 몸에서 떼지 말 것을 당부했다. 같은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는 걸보니 정말 조심해야 하기는 해야겠다.

국경에는 블라와요행 버스(7$)가 있지만 사람이 다 채워지는 오후 8시가 돼서야 출발했다. 도착 시각은 9시 반정도..
버스에서 내지자마자 기분이 으스스하다. 도시 전체가 어두운 분위기이고, 사람들의 인적도 거의 끊겼다. 오늘 숙소로 정한 Packer's Rest로 가려는데 가끔 동양인인 나를 보며 시비를 거는 말투로 말을 거는 사람도 있다. 밤에 도착해서 그런 느낌이겠지만 전체적으로 좀비들의 도시인 느낌이다.

Packer's Rest는 정전이 되어 찾기가 어려웠지만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을 수 있었다. 숙소에 묵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론니에는 도미토리가 5$로 되어 있지만 물어보니 20$이다. 손님이 거의 없어 전체적으로 숙박비를 올린 것 같다.

저녁을 먹지 않아 직원에게 먹거리를 달라고 이야기 하니 빵과 잼을 많이 내준다. 덕분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짐바브웨 소개를 잠깐 하자면 짐바브웨는 우리에게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자국 통화를 폐지하고 US달러와 랜드화가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짐바브웨는 돌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석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악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세기에 반투곡이 북쪽에서 내려와 부락을 형성했으며 9세기에는 쇼나족이 이주하여 농경과 목죽을 하면서 금을 채굴해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과 무역을 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 쇼나족과 로즈위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 연합국인 모노모타파 왕국이 번성기에 지어졌다.

19세기에 남쪽에서 침략해 온 응데벨레족이 로즈위 왕국을 무너트렸고, 응데벨레족 왕인 로벵굴라는 영국의 식민 지도자세실 로즈와 협정을 맺었지만 로즈는 협정을 어기고 1889년에 영국 남아프리카 회서를 설립했다. 응데벨레족은 쇼나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되었다.

1922년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경영 부실로 로디시아 통치권을 포기하기로 했으며 영국은 남아프리카 연합에 통합하기를 희망했지만 백인 주민의 반대로 1923년 남로디시아가 924년에는 북로디시아가 성립되었다. 남로디시아는 지금의 짐바브웨, 북로디시아는 잠비아이다.

이후 쭉 백인 정권이 그들만의 정권을 유지하다가 1963년 영국으로부터 소수 백인 체제로 독립을 추진했지만 영국은 독립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인종차별 첼폐를 요구했지만, 백인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국제적인 제제와 아프리카 민족 동맹의 계속되는 투쟁으로 백인 정권은 고립무원이 되었으며, 1979년 각계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가 열렸으며 1980년 총선거에서 흑인이 승리를 하였고 이듬해 짐바브웨로 독립한다.

그 후 짐바브웨는 사실상 1당 독제 체제에서 무가베가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하게 된다. 마르크스 주의자인 무가베는 2002년 치른 총선거에서 재선하였으나 선거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국 연방 의회는 출석 정지를 했고, 그 후 영국 연방을 탈퇴했다. 특히 2000년 8월에는 백인의 대농장을 강제 수용하여 흑인에게 재분배하는 정책이 실시되자 백인 농장주들은 보상도 받지 못하고 추방되었다. 계속되는 제제와 사회 지도층이던 백인들의 이탈은 이 나라 경제를 파탄을 냈으며 계속되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은 무려 100조$라는 화폐단위를 만들어 냈으며 결국 짐바브웨 화폐가 철폐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고통은 온전히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으며, 훌륭한 관광자원을 보유하면서도 관광객이 찾지 않는(빅토리아 폴포는 제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무가베 정권은 지금도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짐바브웨를 수렁에 밀어 넣고 있으며 결국 짐바브웨는 주변국중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많은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남아공으로 이동해 남아공의 사회문제화가 되었다.


1월 10일(월)

오늘은 그레이트 짐바브웨로 가는 것이 목표이다. 오전 8시에 출발해 블라와요에서 마싱고로 가는 길목에서 마싱고행 버스를 기다렸다. 다행 마싱고로 가는 버스 한대를 발견했다.

버스는 승객이 찰 때까지 오래 기다리더니 출발하자마자 경찰에 의해 제지를 당한다. 아마 뭔가 꽁수를 쓰려다가 들킨 모양.

경찰과 오랜 이야기 끝에 다시 출발을 했지만 길목마다 경찰의 체크포인트가 있으며 그 때마다 오랜 시간을 멈춰야 했다.

결국 시간을 끄는 경찰한테 가서 왜 남아공이나 보츠와나는 경찰이 잡지 않는데 짐바브웨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차량을 잡는지 항의를 했다. 다른 손님이 속이 시원한지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오후 2시 30분에 마싱고에 도착했다. 무려 6시간이나 걸렸다. 이곳에서는 달러와 랜드를 쓰는데 1달러에 7랜드를 쳐 준다. 지폐는 달러로 동전은 랜드로 쓰는 형태이다. 즉 1달러를 7진법으로 나타낸다고 이해하면 된다.(내가 써 놓고도 복잡)

미국돈인 달러가 통용되기 때문에 지폐가 매우 더럽다. 여기서 쓰는 달러는 최소화하고 거스름돈은 최대한 짐바브웨에서 쓰고 가기로 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로 가는 중 사진기가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사진기가 안 되면 낭패인데.. 다행히 몇 번을 켰다 껐다 하니 다시 정상 작동이 된다.

마싱고에서 그레이트 짐바브웨로 가기 위해서는 시내 남쪽의 다리를 건너 차량을 기다려 히치를 하거나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차량을 찾으면 된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인근까지 2$이다.

고물차는 히치해 그레이트 짐바브웨로 간다고 하니 타라고 한다. 근처 정류장에서 사람을 잔뜩 태우고 가는데 또 경찰이 차를 세운다.

이번에는 못 참겠다..

운전사는 트집을 잡는 경찰에게 쩔쩔매며 사정을 하고 있는 중 경찰에게 다가가 ‘니네 그러고도 경찰이야? 경찰은 짐바브웨 시민들 지켜주고 보호해 줘야지. 백인이나 좋은 차량은 그냥 보내주면서 왜 약한 사람들을 괴롭혀? 남아공, 보츠와나 경찰은 전혀 안 그런데 너희는 왜 그래?’

다소 직위가 있는 경찰이 ‘너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다시 이야기 해봐.’라고 대답한다.

‘너희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차라리 내가 걸어가고 만다.’

그리고 차에서 배낭을 꺼내 걸었다. 경찰은 나에게 서라고 말했지만 무시하고 걸어갔다. 걸으면서 표지판을 보니 그레이트 짐바브웨 19Km... 어라? 한 2~3Km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다시 걸어가? 일단 다른 차라도 잡아야지.

한 300m 걸었나? 차 한대가 내 옆에 서는데 아까 내가 탄 차이다. 그렇게 걷기 시작해서 경찰들도 찔리는 게 있는지 내가 탄 차량을 비롯해 다른 차량 모두를 그냥 보내주었다. 다른 차량의 승객들도 나만 쳐다본다. 본의 아니게 약자들의 대변인이 된 셈..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3Km 떨어진 지점에 갈림길이 있는데 운전자는 여기서 내려 걸어가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짐칸에 탄 승객들이 운전사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

운전사는 ‘원래 여기서 내려야 하는데 지금 비가 와서 네가 걸어가기 힘드니까 뒤의 사람들이 그레이트 짐바브웨 앞까지 가자고 이야기 해’라고 전해준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자신들도 짐칸에서 비 맞고 있으면서 나를 배려해 준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호텔에서 내려 700m를 걸어가니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지가 나온다. 이번 여행에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3군데를 꼽았는데 나미비아의 소스블레이, 짐바브웨의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빅토리아 폭포이다. 드디어 두 번째 목적지에 닿았다. 일단 비가 계속 오고 있기 때문에 매표소에서 짐을 내리고 잠깐 앉아서 쉬었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석조물인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3~1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인구는 2만명 정도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 왕국은 짐바브웨, 보츠와나, 모잠비크, 남아공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같은 크기로 잘라낸 화강암 블록을 겹쳐 쌓아올린 것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건축양식이다.

입장권을 끊으면 내일 아침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비가 멈춰 입장료를 끊으니 15$이다. 론니에는 20$로 표기 되어 있는데.. 방명록을 보니 오늘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은 불과 5명이다.

6$를 내고 가이드와 함께 유적지 관람을 시작했다. 가이드 이름은 필립으로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 준다. 유적지는 힐 콤플렉스(언덕), 그레이트 인클로저(큰 돌담), 유적이 곳곳에 잇는 골짜기 벨리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일단 박물관에 들어가 전시 된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관람을 시작했다. 메인인 힐 지역을 오르는데 경사가 가파르다. 필립은 짐바브웨는 ‘Big house stone(큰 돌집)’이라는 뜻으로 새를 숭상하는데 국기에 그려진 새 석조상이 여기서 발견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레이트 힐은 왕의 주거지와 신전이 있는 부분으로 돌로 쌓은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정상 부근에는 왕이 머무는 처소가 있으며 왕이 사람들에게 연설하던 장소도 있다. 특히 동굴에서 왕이 명령을 전하는 과정이 특이한데 동굴에서 소리를 지르면 6Km까지 소리가 전달이 된다며 필립이 직접 소리를 전해준다. 동굴에서 모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림을 알 수 있다. 왕은 동굴에서 ‘7번 너 올라와!’라고 말하면 그 소리를 들은 7번은 뛰어 올라왔다고 설명한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기에 왕의 목소리에 모두가 긴장했으리라.
그레이트 인클러저는 힐 콤플렉스 아래에 있으며 첫째 부인의 거주지였다. 또한 학교와 종교 의식을 하는 시설이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유적은 직경 약 106m, 약 18000개의 돌 블록으로 만들어졌다. 돌담 안쪽으로는 직경 10m의 돌탑이 있는데 이 탑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상징이기도 하다. 종교 의식이나 권력의 상징, 곡식 창고라는 설이 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대한 문자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의 연구로 추정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쉽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관람하고 숙소를 잡으려고 유적지 인근 캠프를 찾았다. 도미토리는 7$로 저렴했지만 사무실에서 열쇠를 받아 확인하니 도미토리 건물은 창문이 열린 채 방치 되어 있고, 주변에는 벌레 소리가 우글거린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머무는 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근처에 가게가 없어 식사가 되지 않는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호텔은 3성급 호텔로 55$까지 방을 줄 수 있다고 하지만 이곳 역시 먹을 것이 없다. 결국 마시빙고로 돌아가 블라와요행 버스편을 찾기로 했다. 이미 7시가 가까워 해가 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서둘렀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3Km 걸어 도로로 나와 마시빙고행 미니 버스에 탔다. 버스 주인장에게 몇 시간을 일하는지 물어보니 새벽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한다고 대답한다. 은 이미 내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곳 경찰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경찰들은 지나가는 차량을 잡아 5$씩을 뜯어낸다고 한다. ‘여기 경찰은 거의 갱스터네?’라고 말하자 맞다며 웃는다. 아무래도 국가 경제 파탄으로 경찰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국민들이 무능력한 정권을 무너트릴 힘이 있어야 할 텐데.. 이미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닐가? 차량 보조에게 5$를 주니 받지 않고 잔돈으로 5$를 거슬러 준다. 아마 돈을 받지 않는가 보다. 주인장에게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면 매우 고맙다고 이야기 하니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준다.

‘아마 네 아들이나 딸이 컸을 때는 지금보다 나아질 거야.’
‘그러겠지?’ 운전사가 씁씁히 웃는다.
‘그럼. 한국도 예전에는 제일 못 사는 나라였거든. 자식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살아야 해.’

버스 정류장에서 블라와요행 버스편을 알아보니 10$를 부른다. 아침에 분명 8$였는데.. 일단 인근 주유소에서 먹을거리를 사는데 한 백인 아저씨가 반갑게 말을 건다.

‘반가워. 난 여기 사는 백인이야. 1971년 태어날 때부터 여기 살았어. 여기 버스는 속임수 많이 쓰니까 내가 도와줄게.’

정중히 사양하고 버스를 탔는데 차량은 승객이 차 출발하더니 아까 먹거리를 샀던 주유소에서 주유를 한다. 아까 만난 백인 아저씨도 그대로 있다.

운전사에게 8$에 가자고 하니 절대 10$를 내야 한다고 하다. 싫다고 말하고 가방을 챙기고 나왔다. 어짜피 지금 불라와요로 가도 숙소 잡는 것은 불투명하다.

백인 아저씨는 자신은 이곳에 친구가 많다며 싼 숙소를 소개해준다고 한다.

‘나는 남아공에서 대학을 다녔고, 우리 부모님은 여기 사람, 조부모님은 독일인이야. 그리고 주절주절...’ 참 수다스럽게 말하지만 그래도 정겹다.

백인 아저씨 이름은 다니엘로 버스 정류장 바로 근처에 Backpacker's Rest라는 숙소로 같이가 숙소 주인에게 자신의 친구라며 잘 부탁한다고 말한다. 이곳의 도미토리가 7$인데 모기장도 있고 샤워도 할 수 있어 꽤 괜찮다. 론니에는 소개 되지 않은 괜찮은 숙소 발견!

도미토리에 가니 현지인이 숙박을 하고 있다. 한 청년은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소개를 한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니 처음 봤다며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

샤워를 하려고 물을 트는데 뜨거운 물만 나오고 찬물은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건성으로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너무 잘나와 샤워를 제대로 못한 건 처음이다.

전체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고 경찰들 때문에 짜증이 나는 하루였다. 그래도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볼 수 있어 나쁘지만은 않은 하루였다. 전체적인 일정에서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위해 2일을 소비했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내일의 목적지는 빅토리아폭포.. 새벽 6시에 불라와요행 버스에 탑승해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