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0일(목)

오전 11시 비행기라 9시쯤 공항에 가니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비행기 출발시각인 11시가 넘어서야 좌석 배정을 시작됨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혼잡한상황이다.

혼잡한 상황에서 외국인 3명을 만나게 되는데 한 명은 인도네시아에서 4년째 영어 교사를 하고 있는 미국 여인으로 와메나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머지 둘은 네덜란드 모녀인데 1960년대 네덜라드 지배 시절 이곳에서 태어나 40여년 만에 딸과 함께 방문하는 길이라고 한다. 우리 넷은 외국인이라는 동질감으로 금새 친해졌으며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비행기 탑승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오후 1시가 넘어서야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다. 비행기는 쌍발프로펠러 비행기로 2차 세계대전 군용 수송기로 쓴 비행기와 유사한 모습이다. 오래 된 비행기라 그런지 소음이 무척 심한 편이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당시 처음으로 월드컵에 우리나라 대표 선수들이 이런 쌍발프로펠러기를 타고 50시간을 넘게 비행을 한 끝에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마저도 일본에서 유럽으로 가는 티켓이 없어서 한 영국인 신혼부부의 양보로 그 비행기를 탔다는 후문이다. 경기 시작 하루 전에 도착했기 때문에 피곤은 더 했을 것이고 그 결과 헝가리에게 9:0, 터키에게 7:0으로 진 아픈 기억이 있다.
화면에 보던 그런 비행기를 타보다니.

소음은 심하지만 창문 밖으로는 끝없는 정글이 펼쳐진다. 저공비행을 하기 때문에 아래 지형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서 와메나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공항 경찰을 찾아가 자야푸라에서 받은 여행허가증 뒤편에 도장을 받았다. 난 그대로 통과가 되었는데 네덜란드 모녀는 허가증 자체를 만들지 않은 상태이다.

허가증 자체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녀들에게 여행 허가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허가증을 받는 방법을 알려줬다.

네덜란드 모녀를 도우느라 공항에서 나 온 시각은 오후 3시 반이다. 와메나를 떠나기에는 늦은 시각이라 숙소를 잡았다.

공항에서 가까운 Syah Rial Makmur 호텔에 가니 주인은 150,000루피아 숙소는 다 찼고 250,000루피아(25$) 숙소 밖에 없지만 특별히 싸게 주겠다는 뻔한 거짓말을 한다.

시설은 형편없지만 비도 추적추적 오고해서 하루만 머물기로 했다.

와메나는 이리안자야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자야푸에서 약 225 km 떨어져 있다. 와메나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밤에는 추운 기온이다.

와메나에서는 모든 물건을 항공으로 싣고 와야 하기 때문에 현지 생산 채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비싸며 특히 외국인에게는 바가지를 씌우는 게 일상화 되어 있다.

자야푸라에서는 4000루피아 하던 아쿠아(Aqua)물은 부피가 크기 때문에 20,000루피아가 넘으며, 콜라와 환타 같은 음료수도 3배 이상을 받는다.

식당에서 먹는 음식도 만만치 않게 비싸지기 때문에 와메나를 여행하기 전에는 먹거리와 음료수를 미리 준비해서 가야 한다.

호텔에서는 가이드라며 견적을 내주는데 모든 준비를 하고 안내를 해주는데 하루 150$를 받는다고 한다. 론니플래닛을 보니 가이드가 없어도 될 것 같은데.. 거금들이는 것보다는 혼자서 개척해보기로 했다.

공항 쪽에서는 싸이렌이 자주 들리는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곳의 모든 물자는 비행기로 실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비행기가 자주 드나들고 있다.

침대에 누우며 한마디 중얼 거렸다.

“사람들이 잘 여행하지 않는다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세계적인 극 오지로 꼽히는 이리안자야에서도 가장 한 가운데 내가 있다니.”

내일 본격적인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한 하루였다.


7월 31일(금)

호텔에 일찌감치 체크아웃을 하고 세어 택시를 타고(4000루피아) 시내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진 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은 바자르 옆에 붙어 있는데 Akima로 가는 버스는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 청년이 나에게 와 영어로 말을 붙인다.

그 청년은 이름이 타퓨즈이고 와메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그는 이곳 사람들의 언어는 모두 다르지만 ‘와’로는 다 통한다고 한다. ‘와’는 우리나라로 치면 안녕이라는 뜻인데 만나거나 헤어지거나 감사하다고 할 때 ‘와’를 쓴다.

바자르 터미널은 사람이 꽉 차야지 출발하기 때문에 터미널 빨리 출발하려면 근처 마을인 Homhom의 갈림길에서 차를 잡는 편이 빠르다.

갈림길에 차를 기다리는데 총으로 무장한 군인을 태운 차가 잔뜩 지나간다. 갈림길까지 따라온 타플즈에게 물어보니 북쪽에 시위 때문에 군인들이 자주 출동한다고 한다.

원래 Akima에서 내려야 하는데 내가 탄 차량은 Akima를 한참 지난 지위카(Jiwika)에 나를 내려준다. 내리자마자 영문도 모른채 서 있는데 현지인 한명이 호기심이 났는지 접근을 한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론니에 적혀 있는 숙소인 Lauk Inn을 찾으려고 하니 서 있는 곳 바로 앞이 Lauk Inn라고 한다.

숙박료는 100,000루피아이며 와메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호텔은 이곳 밖에 없다. 다른 마을에서 자려고 하면 현지인 오두막에서 자야 하는데 웬만한 각오와 탄탄한 준비 없이는 숙박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하다.(특히 이가 많음)

주인아주머니는 영어를 조금 쓰는데 소금 연못인 ‘아에르카람’을 보고 오라고 성화다. 숙소에서 여장을 풀자마자 소금연못을 보기 위해 걸음을 시작했다.

아에르카람을 보기 위해서는 지위카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마을을 구경하며 지날 수 있었다.

마을은 여느 시골 풍경과 비슷하다. 이 지역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할 줄 안다고 한다. 농사를 지으면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고 다음 수확까지의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만 수렵 생활은 사냥감을 그때그때 잡아서 쓰기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는 개념이 없다.

외지인에게 땅을 팔아 거금이 생기면 농경 문화부족은 저축을 하지만 다른 부족은 축제를 하며 그날 다 써버린다.

마을을 벗어나니 진흙 길이 질퍽질퍽해진다. 나무하러 가는 아저씨가 아에르가람까지 같이 가주겠다며 앞선다.

아저씨가 “우~ 와”라고 소리치자 다른 곳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린다. 아마 나무하러 가는 사람끼리의 인사인 것 같다.

산은 정글이기는 하지만 외길이라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도중에 어제 만난 네덜란드 모녀를 만났다. 이런 우연이.. 많이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현지인 여행사의 안내로 여행을 잘 하고 있다.

엄마의 이름은 플로라이고 딸은 옐리스이다. 오늘 이곳을 보고 내일 떠난다며 나보고 즐겁게 여행하라고 한다.

1시간 정도를 등반하자 안내를 해준 아저씨는 한 연못을 가리킨다. 연못물의 색깔은 약간 흐린데 맛을 보니 짜다. 바다에서 하염없이 먼 이곳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소금 공급원이었을 것이다.(지금도 이곳에서 소금을 캔다고 함.)

안내를 해준 아저씨에게 담뱃값이라도 하시라고 10,000루피아(1$)를 드렸다. 이곳에서는 가이드를 쓰지 않아도 현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약간의 사례를 하면 된다.

숙소에 돌아와 2시간 정도 쉬었다가 미이라로 유명한 숨파이마(Sumpaima)로 향하는데 한 청년이 따라 붙는다. 숨파이마는 지위카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어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다.

숨파이마는 전형적인 다니(Dani)족 마을이다. 이리안자야에는 360여개 종족이 살고 있는데 다니족은 그 많은 종족들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방식의 생활로 외지인의 흥미를 끌고 있다.

발리엠 계곡은 이리안자야 대산맥 한가운데에 형성되어 있는데, 이 산맥에는 3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연이어져 있고 발리엠 계곡은 그 중앙에 위치해있다. 계곡이지만 1600미터가 넘는 고지이다.

다니족이 이 곳에 2만년 전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되며 씨족 단위로 흩어져 살기 때문에 가까운 마을이라도 언어가 다르다. 다니족의 가옥은 우리네 초가에 달린 짚을 둥근 형태로 지붕을 만들었다. 집안의 중앙에는 조그만 웅덩이를 파서 모닥불을 피울 수 있게 하는데 이 웅덩이에는 항상 불씨를 남겨 주식인 고구마를 구워 먹고 밤에는 실내 온도를 올려 주는 난로가 된다.

고산지대의 한낮은 강렬한 햇빛으로 30도까지 올라가지만 밤에는 2도까지 떨어져 몹시 춥기 때문에 집안의 불 웅덩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니족의 생활로 들어가면 일부다처제로 한 남자가 보통 2명 이상의 아내를 거느리며 심지어 십 수명의 처를 데리고 사는 경우도 있다.

씨족이 모인 공동체답게 여자와 남자의 방이 구분되어 있어 남자의 집은 주거를 겸한 사당으로 쓰이기도 한다. 때문에 외지인이 현지 마을에서 자려고 하면 사당으로 쓰는 남자방에서는 자지 못하고 그렇다고 여자방에서는 잘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가 마을마다 있다고는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열악하다.

다니족은 결혼한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이들은 절대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데, 임신 중에 관계를 가지면 남자가 약해지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 3년에서 5년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자연히 형제간의 터울이 커져 다른 종족들처럼 자녀가 많지는 않다.

외지인에게 다니족의 상징이 된 것은 '코떼카(koteka)'라는 남자들이 차는 성기케이스이다. 알몸에 꼬떼카만 착용하며 다니는데 나이든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일부다처제인 이 사회 속에서 다니족 여성들은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주식인 고구마나 옥수수,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일에서 가축을 기르는 일, 집안일까지 모두 도맡아 한다.

이와 달리 남자들은 활과 창을 들고 농경지와 그곳에서 일하는 부녀자를 감시하는 것이 주요 일과이다.

다니족 여성들은 남편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돌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추모하는 풍습이 있고, 특히 남편이 죽는 경우에는 부인은 얼굴을 비롯한 온 몸에 진흙을 바르고 한달 간을 추모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숨파이마 마을에서 볼거리는 280년 된 미이라이다. 이곳에서는 죽은 사람을 미이라로 만드는 풍습이 있는데 Mummy라고 불린다. 미이라 구경을 개인적으로 마을 사람들이 전통적인 코떼까 복장으로 하고 다니는 모습이 더욱 볼거리지 않나 싶다. 족장에게 미이라를 보겠다고 하니 50,000루피아를 요구한다. 론니에 적힌 내용보다 2배 넘게 부르기에 궂이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서 봐도 될 것 같아 안 봐도 된다고 하니 금새 25,000루피아로 요금이 다운된다.

돈을 건네니 족장은 오두막 안에서 미이라를 꺼내 오더니 나무 받침대 위에 세워놓고 포즈를 취한다. 한 남자가 내가 가지고 있는 론니플래닛에 호기심을 느끼기에 발리엠 계곡 지도를 펼쳐놓고 지명을 읽어주니 마을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 같이 지도를 본다.

웃으면서 지도에 나온 지명 하나하나를 마을 사람들에게 읽어줬다. 미이라를 두고 포즈를 취하던 족장만 머슥해졌다.

지도를 읽어줌으로서 마을사람들과 마음을 열게 되었고 족장은 물론 코떼까 복장을 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숙소에서부터 따라 온 청년 말에 의하면 원래 사진 찍는 모두에게 돈을 줘야 한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오는 길에 평화롭게 풀을 뜯는 돼지를 많이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례적인 광경으로 이곳에는 이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한 것을 반증한다.

오늘의 마지막 목표는 구아 코티리라(Gua Kotilila)라고 불리는 동굴이다. 구아(Gua)는 동굴을 뜻하는데 론니 지도상으로는 숨파이마 마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막상 걸어보니 끝이 없다. 숙소에서 우연히 만나 어쩌다 안내원이 된 청년 미르콴은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 물을 때마다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조그만 더 가야 한다고 다독인다.

1시간 반 정도를 걸으면서 힘들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괜찮았다. 이곳 사람들은 길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뛰노는 아이들, 빨래하는 아낙네, 농사일 끝내고 귀가하는 농부등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다. 동그란 모양의 집 모양만 빼면 여느 농촌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구아 코티리라에 도착해 입장료(20,000루피아)를 내니 잠긴 문을 열어준다. 동굴은 짧은 크기인데 한 10m쯤 되보이는 종류석이 압권이다.

종류석을 보고 랜턴을 켜고 박쥐 소리가 나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니 박쥐가 푸드덕 거리며 날아다닌다. 더 이상 들어가면 박쥐가 떼로 날아올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는 차를 잡고(2명 10,000루피아) 숙소로 간편하게 돌아왔다. 호기심에 따라 온 미르콴에게 가이드비 20,000루피아를 건네주니 연신 고맙다고 한다.

내가 더 고맙지.. 여행사 가이드를 썼으면 그보다 수십배는 더 줘야 했을 테니까. 이곳을 여행하는 대다수의 여행자는 가이드를 쓰며 론니에도 가이드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나처럼 마을에 들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가이드를 만들고 다니는 것도 괜찮을 방법인 것 같다.

어짜피 설명은 론니 플래닛에 다 있기 때문에 가이드의 역할은 길만 안내하면 되기 때문이다.
숙소인 Lauk Inn에 돌아와 밀린 빨래를 하고 샤워를 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뜨거운 물을 부탁하니 보온병과 차, 설탕을 통째로 주신다.

또한 저녁 식사도 제공이 되는데 밥과 라면에다 계란을 반찬으로 주신다. 이 정도면 서비스가 꽤 괜찮은 편이다.

물론 오지답게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양초로 불을 밝힌다. 마을은 어두워지는 시각인 오후 6시가 넘으면 왕래 하는 사람 없이 고요하다. 예부터 농촌 사람들이 부지런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밤에 할 수 있는 활동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형성되었으며 또한 다산(?^^)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전기가 사람에게 이로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현대인의 수면 부족의 1등 공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촛불에 의지하며 책을 읽는데 이것 또한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오지 산촌 체험이라고 해서 전기가 없는 산촌에 촛불에 의지하며 옥수수밥을 먹으며 며칠 기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잘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