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토)

오전 6시에 일어나 곧바로 국경으로 향하는 푸조 차량에 탔다. 세어 택시에 3명이 타서 1인당 1500CFA를 지불했지만 승객이 찬 차량에는 1000CFA를 지불하면 된다고 한다. 우리가 타는 차량 역시 국경으로 향해야 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국경으로 가는 길은 해변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정글이 쭉 펼쳐져 있다. 우리가 아프리카 밀림으로 상상하는 풍경으로 타잔이 활동했음직한 환경이다.

가나와 가까워질수록 검문이 많아지는데 검문을 할 때마다 나는 무사히 통과되지만 잭슨에게는 트집을 잡거나 뇌물을 요구한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차별을 하는 건가?

아프리카의 국경이라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통과를 했다. 하지만 잭슨은 결국 2000CFA를 뜯겼다고 투덜댄다.

국경은 100CFA를 주고 차량을 통해 넘을 수 있는데 국경사이가 얼마 되지 않아 그냥 걸어서 넘어갔다.

국경사이에는 큰 다리가 있는데 밑에 흐르는 강을 비롯해서 풍경이 아름답다. 핸드폰 사진으로 풍경을 찍으니 잭슨 역시 카메라를 들고 따라 찍는다.

잭슨에게 소니 디카를 얼마에 샀는지 물어보니 작년에 200$ 좀 넘게 주고 샀다고 한다.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네.  

드디어 서아프리카 두 번째 나라 가나이다.

우리에게는 가나 초콜렛과 축구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을 것이다.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골드코스트라 불리는 이곳은 1475년 포르투갈 선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의 금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 포르투갈 왕인 존 2세 왕은 골드코스트에 항구적인 기지를 구축할 것을 결정한다.

1482년 엘미나에 세워지게 되면서 유럽에 의한 요새의 역사가 시작 된다.

가나 즉 골드코스트라 불리는 이곳은 해안선을 따라 일정간격으로 요새가 늘어서 있다. 아프리카의 기후가 유럽인들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지점마다 요새를 세워놓고 현지인과의 무역을 했다. 요새는 일종의 방어막이면서도 무역품의 창고 역할도 했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이 이곳에 뛰어들었고 아메리카 지역의 개척으로 일손이 딸리게 되자 17~8세기에 악명 높은 노예무역이 시작된다.

노예무역은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이외에도 스웨덴, 덴마크, 프로이센 상인들이 서아프리카에 뛰어들어 노예무역에 매달렸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상식 중에 하나는 서양의 상인이 노예를 직접 잡아다 인신매매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송가이 제국이후 이곳 지역은 수많은 작은 왕국들로 찢어졌는데 그 왕국들이 재원을 만들기 위해 주로 죄수나 전쟁포로를 잡아다 노예로 팔았다.

비슷한 이야기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욕심 많은 나라의 왕이 자기 나라 백성을 금은보화를 받으며 다른 나라에 팔았는데 결국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 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서아프리카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이웃을 노예로 판결과는 19세기 말의 식민지로 이어지지 않았나싶다.    

  국경을 넘자마자 환전을 했다. 가나 화폐는 세디(Cedi)로 표기는 가격 앞에 C를 붙이도록 하겠다. 국경 환율은 1$에 C9300이다. 잭슨은 일반적으로 1$에 C9400을 하니 그리 나쁘지 않은 환율이라고 말한다.

50$를 환전을 하니 C465000를 받아야 하는데 지폐의 화폐 단위가 작다.

잭슨은 2008년 부로 가나 화폐 개혁이 이뤄졌다고 한다. 기존의 C10000를 C1로 10000분의 1을 화폐 단위를 축소했다. 그 아래 단위는 C5000은 50페세와스(Pesewas)로 쓴다.

우리나라 원화는 1$에 930~40원 정도 하니까 세디에서 곱하기 100을 해서 그대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된다.

6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쳤다고 하지만 아직 이곳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가보다. C1을 텐사우전(10000)로 부르고 있다.

당연히 물가는 코트디부아르보다 다운이 되었다. 국경에서 C1에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타고라디(Takoradi)로 향하는 차편을 알아보았다. 4인승 승용차는 1인당 C6을 부른다.
터미널에서 가격을 조사하니 타고라디는 C3.2, 아크라는 C12, 토고 국경인 아프라오(Aflao)까지는 C18을 한다.

모든 과정에 영어가 통하니 한결 편하다. 이렇게 영어를 간절히 원한 적이 있었던가? 가나에서는 비교적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미니버스 안은 덥고 비좁은 환경으로 꽤 열악하다. 그러나 이미 많은 여행을 통해 내성이 생긴 내가 아닌가. 타고라디까지 가는 세 시간동안 책을 보며 여유롭게 버텼다.

도중에 나이 지긋한 신사가 버스를 타는데 갑자기 눈을 감으며 기도를 하는 것이다. 버스안의 모든 승객도 따라 눈을 감으며 기도를 한다.

그의 말투나 표정은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는 때와 같다. 어디가나 설교를 하는 태도와 말투는 똑 같구나!

잭슨에게 목사인지 물어보니 메디슨이라고 대답한다. 메디슨? 아.. 약장사구나.
기도가 끝난 후 여러 약을 꺼내더니 익살스럽게 설명을 한다. 버스 승객들은 코믹한 그의 태도에 몰입을 한다.

포도주스와 비슷한 색깔의 액체를 한 병당 C2에 팔고 있는데 과연 사람들이 넘어갈까?
역시..

너무 쉽게 넘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 모를 액체와 약품을 산다.(잭슨까지도..)

버스가 타고라디에 도착할 때쯤 약장사는 역시 기도로 모든 걸 끝낸다. 덕분에 지루한 버스 여행이 조금 재미있었다.

정류장에서 잭슨은 나를 케이프코스트(C1.8)로 차량을 잡아주고 아크라로 떠난다. 하루의 만남이지만 진한 우정이 느껴지는 그였다.

도로는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 있으며 곳곳에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의 개최를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1월 20일부터 네이션스컵이 열리는데 이곳 사람들은 메이저 대회를 개최 한다는 자부심에 들떠있다. 첫 게임이 강호 코트디부아르와 나이지리아라 더욱 이슈거리가 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케이프코스트에는 오후 4시에 도착했다. 곧장 해변 쪽을 향했다. 날씨는 매우 덥고 많은 차량에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복잡한 분위기이다. 어서 숙소를 잡고 샤워를 하고 싶다.

메인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게동상(Crab Statue)이 있다. 저걸 왜 세워놨지? 모습도 재미있고 이곳 길을 찾는데 지리를 아는데 좋은 이정표가 될 것이다.

케이프 코스트성 바로 옆의 오아시스 게스트하우스는 가격이나 위치로는 가장 좋은 숙소이지만 역시나 방이 꽉 찼다고 한다.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Sammo 게스트하우스에 갔다. 한 할아버지가 방을 보여주는데 열악한 환경이다. 저렴한 것도 좋지만 여행을 와서 어둡고 지저분한 방에서 지내는 것은 싫다.

마지막으로 Sammo 게스트하우스 바로 뒤에 있는 Amkred 게스트하우스에 들렀다. 이곳마저 상황이 안 되면 케이프 코스트성을 관람하고 곧장 아크라로 가려고 했으나 그런대로 만족할만한 시설이라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다.(C9.6)

샤워를 하고 여행기를 정리하다보니 어느덧 밤이다.

가로등이 없는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터넷카페를 찾아 케이프코스트성 쪽으로 향했는데 좀 으스스한 분위기이다.

게동상 주변에는 많은 노점들이 있는데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오늘 케이프코스트에서 한 경제 활동의 결과 다음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가나를 여행하는 이들은 참고하도록.

국수+킨 한 조각이 C0.7이고 베지밀이 C0.9이다. 500ml 콜라 한 병은 C0.7, 토마토 한 봉지는 C0.5, 바나나 1줄 C0.4, 물 1L C0.7.

이곳에서는 음료수 보다는 과일이 훨씬 저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잠들려고 하는데 숙소 안에 모기가 많다. 방충망을 쳤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뚫고 들어오는지.. 이러다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모기 덕분에 깊이 잠들지 못한 가나에서의 첫날이 되었다.


1월 6일(일)

케이프코스트는 어촌이지만 꽤 큰 도시이다. 도시와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지만 고기를 잡는 나룻배와 잡은 고기를 말리고 다지는 어촌 마을의 풍경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시내 곳곳에 세워진 교회와 유럽식 건물이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는 표식 역할을 한다.

케이프코스트성은 백색건물인데 입국에는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1637년 네덜란드에 의해 지어졌지만 1652년 스웨덴의 차지가 되었고 결국에는 영국의 손으로 들어와 1877년 아크라로 수도가 옮겨질 때까지 중심지 역할은 한 굴곡 많은 역사를 지닌 곳이다.

입장료는 7$인데 C6.5를 내고 들어갔다. 카메라피는 따로 C1을 받는다.

골드코스트의 중심지였던 것치고는 생각보다 요새의 규모가 크지 않다. 가장 먼저 박물관에 들리는데 이곳 자료를 통해 골드코스트의 역사를 알 수 있다.

BC 2000년 전부터 AD1400년까지의 테라코타가 전시되어 있으며 당시 생활상을 삽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특히 원숭이 모양의 사람들이 사금을 채취하는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미국에서 노예 경매 풍경도 뇌리에 깊이 박힌다.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성공한 흑인들의 사진도 전시해 놓았다.

대포는 바다와 육지 모두를 향해 배치가 되었으며 입구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대포알도 볼 수가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바로 지하 던전(창고)이다. 던전에 들어가니 기분이 으스스하다. 롤플레잉 게임의 던전을 연상되는 모양새이다.

이곳에서 노예들이 감금되었다고 한다. 어둡고 퀴퀴한 지하에서 알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케이프코스트성을 탐방한 후 아크라로 갈지 근처의 엘미나 요새를 탐방할지 고민했지만 이내 엘미나 요새로 가기로 결심했다. 서아프리카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성채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엘미나성에서 메인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어제 봤던 게동상이 있고 500~600m를 더 가서 왼편에 보면 엘미나로 떠나는 버스들이 대기하는 정류장이 보일 것이다.

버스는 사람이 꽉 차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는데 워낙 왕래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요금 C0.4)

버스는 해변을 따로 쭉 달리는데 우리가 상상하는 남국의 풍경이 펼쳐진다. 야자수가 펼쳐지고 아름다운 모래해변에 고기 잡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온한 느낌을 준다.

유사 이래로 서양과 동양을 비교했을 때 동양 문화가 서양에 비해 우위에 있었는데 대항해 시대를 기점으로 그 우위가 서양으로 넘어가지 않나 싶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후추, 비단, 도자기 등에 열광적인 분위기였고 아시아로 향한 무역은 이탈리아가 독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앞선 문물을 바탕으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기는 잠시뿐 아시아로 향한 모든 무역 통로가 이슬람화 되면서 유럽인들은 아시아로 가기 위한 새로운 통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해양 통로 개척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소외된 소국인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415년 모로코 정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연안의 항구인 쉐타를 점령했다. 포르투갈왕은 쉐타 총독으로 왕자를 임명하는데 바로 왕보다도 더 유명한 항해왕 엔리케왕자이다.  

엔리케는 1460년 사망 할 때까지 탐험 선단을 아프리카 남쪽으로 보낸다. 1418년 대서양의 마데이라가 발견되고 1434년에는 케이프보자도르까지 이르렀으며 1439년 아조레 제도가 목격되었고, 1443년에는 아르긴소도가 발견되었다. 대서양 해양 지도는 점점 남쪽으로 내려갔고 1448년에는 아르긴도에 요새를 구축했다. 1444~45년에 세네갈강 하구와 케이프베르드까지 도착했고 최초로 이슬람인이 아닌 니그로인들을 목격했다.(생포해서 왕에게 바쳤음)

1460년에는 시에라리온에 도착하였으나 엔리케 왕자가 사망하고 나서 잠시 정체기를 가진다.

리스본 상인엔 페르나오 고메스는 1469년 포르투갈왕에게 새로운 해양을 개척하는 허가를 받았고 1475년에 적도를 통과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뜨거워지고 결국에는 불지옥에 다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포르투갈 선원들에 의해 더워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적도를 지나서는 더욱 자신감이 붙어 1482년 콩고를 발견하게 되고 5년후에는 바톨로뮤 디아즈가 희망봉을 일주했으며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직항로가 개척된다.

중학교 시절 ‘대항해 시대’라는 컴퓨터 게임이 유행했는데 이 게임의 시대가 바로 지금 설명한 신항로 개척의 시대이다. 그 게임을 즐기면서 나 역시 저 서아프리카를 갈 수 있을지 동경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의 꿈이 지금 이뤄졌다. 지금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은가?

항로가 남쪽으로 개척 될수록 요새 역시 점점 남쪽으로 구축되었는데 엘마나 요새는 1482년 포르투갈에 의해 세워졌다.

엘미나 요새의 역할은 처음에는 인도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했을 거라 생각된다.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서아프리카 무역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가 노예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엘미나 요새를 비롯한 골드코스트 해변은 유럽 각국이 경쟁적으로 요새를 구축하게 된다.

엘미나 요새는 한눈에 천혜의 요새 지형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외관은 케이프코스트와 비교하면 더 아름답다.

요새로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 주변으로 현지 고깃배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엘미나 요새는 입장료는 C6.5(6500원)이다.

요새를 둘러보자마자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었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카메라를 대신하는 역할이 주어졌는데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잠들었다. 귀국하면 더욱 사랑해줘야겠다.^^

다시 케이프코스트로 돌아와 아크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요금이 C3.5으로 론니보다는 약간 비싸게 불렀지만 제일 앞자리에 탈 수 있어서 만족했다.

차량은 승객을 모으기 위해 시장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는데 시장 전체가 차와 사람들도 장사진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운전자를 비롯한 차안의 모든 사람들이 물과 과일을 사먹는다. 도로에는 물과 과일을 파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차가 설 때 싸인을 주면 달려와 마실 거리를 판다.

아이스크림이 C0.4(400원), 먹이 좋게 자른 파인애플 조각이 C0.1~C0.2이다. 공장을 거치는 모든 제품이 수업이 되기 때문에 음료수나 아이스크림보다는 과일을 사먹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건강에도 좋다.

아크라로 가는 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어 편하게 올 수 있다. 가끔 검문소에 차를 세우는데 앞자리에 외국인인 내가 타고 있어서 그런지 별다른 검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Are you ok?'라고 안부를 물을 정도로 친절하다. 아프리카에서는 가장 큰 축제인 네이션스컵을 개최한 영향이지 않나 싶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던 당시에 올림픽 공원 바로 옆 학교(성내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무조건 친절하게 대하라는 당부가 아직도 기억에 새록새록 남는다. 특히 흑인과 마주치면 절대 초콜릿이나 연탄 또는 ‘검다’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진지하게 당부하신 모습이 떠올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곳 사람들의 친절은 아크라에 도착해서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정한 DATE 호텔을 찾는다. 길을 물을 때마다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면서 친절하게 알려준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DATE 호텔에 다다를 수 있었다.

DATE 호텔은 론니에 표시 된 가장 저렴한(C8) 호텔이다. 방마다 화장실, 샤워 시설이 없는 것이 흠이지만 깨끗한 시설에 좋은 위치에 있어서 추천할만하다.

저녁이면 호텔 주변에 흥겨운 음악소리로 시끄러울법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프리카의 분위기라고 여기며 흥겹게 들어주면 문제없다. 무엇보다 DATE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모기가 없다는 것이다.

여장을 풀고 샤워와 밀린 빨래를 하고 식사를 하러 밖을 나서려는 순간..

돈이 C3 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에 물을 사니 C2.3..

더구나 일요일이라 환전할 곳도 여의치가 않아 할 수 없이 준비해 온 비상식량(전투식량)으로 저녁 식사를 떼웠다.

아크라에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사야하는데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카메라를 팔 만한 곳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Nothing~ 남은 돈으로 딸기우유(C1.4, 우리돈 1400원) 하나 사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내일 발품을 발아서 카메라를 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