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1일(금)

아프리카의 쿠바라고 불린 베냉은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계속되는 쿠데타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맞았었다.

1972년부터 케레쿠가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1991년 세계은행 출신의 소그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6년 케레쿠가 다시 권력을 탈환하였고, 2006년 3월 미국, 프랑스가 나서서 그의 33년의 독재를 마감시켰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서아프리카 발전 기금(West African Development Bank)의 수장이었던 야이 보니(Yayi Boni)가 대통령이 되었다.

베냉은 토고와는 달리 민주화와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 큰 화물선이 정박할 수 있어 이웃 토고에 비해 물류 환경이 비교우위에 놓여 있다.

서아프리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프랑스다. 이곳을 여행한 행창스님의 여행기에 따르면 프랑스 식민지에 있던 나라는 모든 정권의 승인이 프랑스로부터 이뤄진다.

다시 말해서 독재나 쿠데타건 프랑스가 승인하기만 하면 성공이고 프랑스가 인정하지 못하면 내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토고의 2대에 걸친 독재 역시 프랑스의 승인이 있어 가능했으며 코트디부아르 같은 경우는 프랑스의 개입으로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나라도 전두환 정권이 12.12 쿠데타 이후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갖은 아양을 떨면서 미국 2박 3일 방문을 허락 받은 경험이 있다.

뭐.. 멀리 볼 것도 없이 얼마 전에도 대선을 앞두고 한 후보가 미국에 알랑거리는 모습이 나오지 않았나..

미국과 프랑스야 직접적인 식민지는 아니지만 종주국으로서 그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 잘 듣는 애들이 필요할 것이다.

2년 전 투르크메니스탄을 여행을 하면서 정말 생 독재 정치에 말도 안 되는 법률로 국민을 억압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았는데 여행이 끝나고 우연히 YTN을 틀었을 때 투르크메니스탄 주재 미국 대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민주주의는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인터뷰를 보며 실소를 참지 못한 적이 있다.

다시 프랑스 이야기로 돌아가서.

1957년부터 서아프리카 나라가 독립을 했을 때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각 식민지에 ‘너희들 독립할래? 자치권을 받아서 우리끼리 뭉칠래? 선택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기니(Guinea)가 덥석 독립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프랑스로부터 지원 중단, 관료들 즉각 철수 등의 보복으로 혼란에 빠진 때가 있었다.

서아프리카에서의 프랑스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화폐 단위인 세파프랑의 프랑이 유로화를 쓰기 전의 프랑스 화폐 단위이며 모든 공영어와 교육은 프랑스어이다. 또한 그 나라의 관광 비자를 프랑스 대사관에서 발급할 정도이다.

오전 9시 니제르 비자를 받기 위해 니제르 대사관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토고와 마찬가지로 오토바이를 타고 주로 이동을 하는데 이곳 오토바이 택시는 윗옷을 노란색 옷으로 맞춰 입은 것이 이채롭다.

니제르 대사관은 손님이 거의 없고 조용한 절간 분위기가 난다.

니제르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3일을 기다려야 하지만 직원에게 오늘 받지 못하면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월요일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사정을 했다. 또한 여행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복수 비자를 달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요구 사항이 많다.

처음에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던 직원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니 그럼 오늘 12시까지 오라고 말한다. 오늘따라 대사관에 손님이 거의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기분 좋게 비자피(22500CFA)를 내고 대사관을 나섰다.

베냉의 사실상의 수도인 코토누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매연이 지독하다.

길가에는 값싼 휘발유를 파는 노점상이 줄 지어 있는데 아무래도 물탄 휘발유가 아닐까 싶다. 싼 맛에 거의 모든 오토바이가 저질 휘발유를 쓰고 대부분의 오토바이가 시커먼 매연을 뿜어내고 있다.

우체국으로 가서 엽서를 붙이고(700CFA) 매연을 피해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 답답한 실내 공기가 이곳에서는 가장 깨끗한 공기이다.

그나마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올 정도로 매연이 심하다. 분명 10~20년 안에 폐암 환자들이 무더기로 쏟아지지 않을까 싶다.

12시에 니제르 대사관가니 비자가 이미 발급이 되어 있었다. 친절한 직원에게 한번 더 감사 인사를 하고 은행에서 환전을 했다. 이곳 은행은 환율이 1$에 440CFA, 1유로에 655CFA(환전시 648CFA)이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1$에 421CFA, 토고에서는 432CFA, 여기는 440CFA.. 도대체 알 수 없는 환율 변동이다. 유로는 그대로 묶어 놓고 달러는 나라마다 제각각이다. 혹시 여행하려는 분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매연을 피해 해변으로 나가니 큰 항구에 대형 화물선이 정박한 것이 보인다. 저 항만시설이 이곳 베냉의 경쟁력이리라.

스산한 눈빛으로 항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프랑스인 노부부가 나를 보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어본다.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상하이를 여행해 봤다며 어설픈 중국어를 쓴다. 국가 차원에서 한국에 대해 좀 더 홍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순간이다.

해변에는 야자나무가 보이지 않지만 물이 얕아서 발을 담굴 수 있다. 토고와 달리 해변에 자고 있는 사람이 없으며 동네 주민들이 슬슬 지나다니는 분위기이다. 백사장은 토고 보다 안전하다.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니 꼬맹이들이 장난스럽게 다가와 잡은 물고기를 보여준다. 사진을 찍어주니 좋아라 한다.

해변에서 나와 코토누 시내를 돌아다니려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과일을 사 들고 다시 매연을 피해 호텔로 돌아왔다. 어서 빨리 매연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해가 지고 인터넷을 하러 호텔을 나섰을 때 동양인 할머니 한분이 나를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에 할머니가 왜 계시지?

할머니는 유창한 영어로 싱가포르 사람이라고 하면서 몇 년 전 짐을 잃어버려 싱가포르로 돌아가지 못한다며 저녁거리를 사먹게 도와달라고 구걸을 한다.

왜 싱가포르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니 그냥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달라고 한다.

이건 더 이해 못하겠다. 여기는 서아프리카가 아닌가? 왜 할머니가 이곳에 있으며 가족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한국에 돌아가면 싱가포르 정부와 대사관에 연락을 하겠다고 신상을 알려달라고 하니 돈 주기 싫으면 그냥 가라고 이야기 한다.

어떻게 그냥 가나..

내가 오히려 통사정을 하며 신상을 알려달라고 하니 할머니는 귀찮다며 자리를 뜨신다. 어안이 벙벙하다.

호텔 경비원은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몇 년 전부터 구걸하는 할머니라고 말하지만 그러기에는 복장이 너무 깔끔하다. 국적이 확실하지 않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행이 끝나면 싱가포르 대사관에 알려야겠다.

그동안 함께했던 후영씨와는 떨어져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스타일이 달라 잘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후영씨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사진을 찍어야 하지만 난 빠른 시간에 많은 곳을 돌아보는 것이 목표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

내일부터는 다시 홀로 여행이 시작된다.

(TIP) 오늘 돌아다니며 산 가격이다. CFA에서 2.2를 곱하면 거의 원화와 비슷하게 된다.
파인애플 1개 200CFA, 토마토 1Kg 500CFA, 바게트 125CFA, 딸기잼 1450CFA, 치즈 750CFA, 현지인들이 먹는 밥 100~200CFA, 음료수 200CFA, 맥주 한 캔 650CFA


1월 12일(토)

오전 6시 반에 일어나 짐을 챙긴 후 소나코프 스테이션(Sonacop Station)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보메이(Abomey)로 가는 차를 알아보니 한 운전자가 배낭을 낚아채듯이 가져가 차에 싣는다.

지금 출발한다고 해서 타니 뚱뚱이 아줌마가 옆에 앉는다. 앞좌석에 아줌마가 앉기도 버거운데 운전사와 아줌마 가운데 내가 끼었다고 상상해 보라.

출발한지 10분도 안 되어 허리가 아파온다. 이거 완전 속듯이 온 것 아냐?
도저히 못 참아서 운전사에게 내리겠다고 하니 뚱뚱이 아줌마가 미안한지 운전사와 내 가운데로 앉는다.

이건 내가 더 미안한데..

창가에 앉아서 허리는 편했지만 아줌마의 살들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자세로 3시간을 버텨야만 했다.

아줌마~ 살 좀 빼세요.

아보메이에 들어가기 전에 보이콘(Bohicon)에 들리는데 뚱뚱이 아줌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린다. 시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다. 우리의 새마을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 사람들도 토요일에는 거리 청소를 하는가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택시 오토바이의 복장이 보라색 윗옷이라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복장이 다른가보다.

홀가분하게 아보메이에 도착했는데 운전사가 2500CFA를 달라고 한다. 뭐야? 분명 2000CFA라고 했잖아. 비좁게 온 것도 서러운데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다니.

잠깐 실랑이가 오갔지만 운전사는 이내 포기를 한다.

아보메이는 다호메이(Dahomey)왕국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었다.

서아프리카는 가나~말리~송가이 제국이로 이어지던 서아프리카는 송가이 제국이 망한 이후에는 수많은 작은 국가들이 나라를 세우고 흥망성쇠를 이어갔다.

다호메이가 성립한 것은 17세기 전반에 알라다에서 독립을 하면서 부터이다. 주변국과는 달리 절대군주로서 모든 국민을 신민으로 취급하면서 복종을 시켰으며 군대를 독점적으로 했다. 때문에 강력한 왕권과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다.

1850년 당시 영국은 노예무역을 전면적으로 금지를 시켰는데 군사적으로 매우 강력한 다호메이는 노예무역을 지속을 시켰고 19세기말 프랑스가 침입했을 때에도 독일령 토고로부터 총을 사서 항전을 했지만 결국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다호메이의 왕궁은 박물관(Musee Historique d'Abomey)으로 꾸며져 있는데 베냉을 여행하면 꼭 가봐야 할 명소이다.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입장료(2500CFA)를 내고 들어가면 가이드가 사람들을 모은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프랑스 관광객이고, 가이드의 설명도 프랑스어로 한다. 난 그저 분위기를 보면서 따라다녔다. 설명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부조와 유물을 통해서 충분히 파악이 가능하다.

왕궁안으로 들어가니 수 많은 동물뼈가 보인다. 다소 으스스한 분위기이다.
다호메이는 앞서 설명하다시피 적들을 잡아 노예로 팔거나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특히 사람의 목을 잘라 창끝에 매달거나 국기에 매달았으며 사람을 해체해서 장식을 했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흔히 아프리카하면 사람을 잡아다 꽁꽁 묶어 놓고 추장이 나와 춤을 추며 제물로 바치는 것을 상상했는데 그러한 상상이 들어맞는 곳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쪼개서 관람하기를 정말 잘 했다.

11시 40분경 투어가 끝났다.

이제는 니제르를 향해 북쪽으로 갈 차례이다.

오토바이(500CFA)를 타고 국도에 위치한 보이콘(Bohicon)에 이동을 했다. 북쪽 중심도시인 파라코우(Parakou)까지 이동하는 차량을 찾는데 7000CFA를 부른다.

8000CFA에 앞자리에 혼자 앉는 조건으로 차량을 탔는데 아까 뚱뚱이 아줌마에 끼어 온 것을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아마 오랜 시간 손님을 채우지 못해 출발하지 못한 차였나보다.

파라코우(Parakou)는 코토누에서 415Km 떨어져 있으나 보이콘부터는 도로 상태가 괜찮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4시간) 도착할 수 있었다. 북으로 갈수록 사막화가 심해지고 이슬람 문화가 많이 보이는 것을 관찰 할 수 있다.

오늘 파라코우에서 묵어? 무리해서 니제르로 들어갈까?

같이 동승한 청년이 영어가 조금 통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청년을 통해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Air Transport 회사 버스가 오늘 이곳을 통과해 니제르로 들어간다고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 외곽의 Air Transport 사무실에 가니 한 청년이 자고 있다.

깨워서 니제르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물어보니 청년은 부스스한 표정으로 오늘 9~10시에 파라코우를 지나가며 니제르 수도인 니아메까지 가며 요금은 11200CFA(25000원 정도)한다고 말한다.

사무실 바로 옆에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파리가 들끓고 식당이 열악하다. 밥과 함께 소스에 담긴 양고기 두 조각을 시켜서 먹는데 식사도중 파리 한 마리가 양고기 소스에 다이빙을 하며 장렬히 전사한다. (양고기+밥, 600CFA)(음료수 350CFA)

결국 죽은 파리를 보면서 식사를 해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니 오후 4시.. 최소한 5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가져온 서아프리카 역사책을 보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1시간 뒤 오후 5시가 되자 자고 있던 청년은 자기 가게를 봐야 한다며 나보고 사무실을 봐달라고 한다.

곧 사무실에 사장이 들렀지만 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어디론가 다시 나간다.

이거 한순간에 사무실 알바 생이 되었다. 라디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왕왕거리고 있고 혼자 사무실에서 저녁을 챙겨 먹었다.

버스가 없으면 사무실에도 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 구석에서 모기떼들이 그득한 것이 보인다. 이곳에서 자면 지옥이 되겠군..

손님이 사무실로 찾아오면 나에게 ‘봉주~(안녕)’하고 인사를 하고 내가 손님을 맞는다.(뭐 그래봤자 주인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다임)

이제는 사무실을 벗어나 주변 상인들 하고도 친해졌는데 지갑을 파는 유습이라는 이름의 아저씨는 자신의 아들을 나에게 준다고 한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알고 웃어넘겼으나 진지하게 전화번호를 적고는 연락을 준다고 하니 얼른 수습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유습.. 만약 아들을 나에게 보내면 나 장가 못가.’

‘괜찮아. 아들이 다 컸기 때문에 문제없을 거야.’

‘뭐가 문제없어. 안 돼! 무조건! 그러면 한국에서는 장가 못가.’

‘나 참.. 장가가는 게 뭐가 힘들다구.. 난 18살에 장가가서 지금 부인이 둘이 있건만..’

이곳 사람들은 18~20세의 빠른 나이에 결혼을 하며 여자들은 15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막막한 군대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하지 않던가?

어느덧 밤 10시가 되고 코토누에서 출발한 버스가 이곳에 도착했다.

잠시지만 정든 사람들과 안녕.. 잠깐 무보수 아르바이트 했던 사무실도 안녕~

버스는 한 줄이 좌측부터 좌석 3개, 통로 그리고 2좌석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데 승객이 많지 않아서 좌측의 3좌석을 모두 차지해 누울 수 있었다.

자 이제 북쪽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