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8일(금)

오전에 인터넷을 하고 백형철 목사님에게 연락을 하니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목사님과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순간이다.

그럼 부르키나파소로 가기로 결정!

이곳에서는 환율이 워낙 나빠(1$에 421CFA) 웬만하면 환전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당장에 남은 돈이 20000CFA 밖에 되지 않아 100$라도 환전을 하려고 사설 환전소에 가니 1$에 435CFA를 부른다. 꽤 좋은 환율이라 200$를 환전했다. 이로서 여행 총알은 충분히 장전했다.

출발 직전 엽서를 보내려는데 엽서 값 400CFA(2.1배를 곱하면 우리 돈임), 한국으로 엽서를 붙이는데 750CFA를 냈다. 지금껏 여행하면서 가장 비싼 가격이다.

부르키나파소로 가는 차량을 찾아 니제르강을 가로지르는 케네티 다리를 넘어 남쪽으로 걸었지만 정류장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정류장까지 가는 택시를 타고 찾을 수 있었다. 걸어서 가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쉐어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정류장에서 부르키나파소 와가두가까지 가는 표(10000CFA)를 사니 앞좌석에 앉으려면 1000CFA를 더 내야 한다고 한다. 일단은 무시했다.

서아프리카에서는 정해진 가격 이외에 짐과 좌석에 대한 가격을 따로 받는데 워낙 거짓으로 돈을 받는 경우가 있으니 일단은 무시하고 있으면 그냥 출발하거나 정말로 내야 할 경우는 출발 직전에 내면 된다.(난 배낭피를 거의 내지 않았음.)

미니버스에 사람이 다 찰 때까지 오랜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동안 책을 읽거나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한 아저씨가 ‘쓰읍’ 하면서 나를 부른다.

서아프라카에서 사람을 부를 때는 입으로 뱀소리를 내는데 입을 약간 다문 상태에서 숨을 들이쉬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쓰읍’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이다.

처음에는 기분 나빴지만 많이 듣다보니 이제 익숙해졌다. 나 역시 택시를 잡을 때 ‘쓰읍’하는 소리를 낸다.

나를 부른 아저씨는 일자리가 없다며 어떻게 한국에 갈 방법이 없는지 물어본다. 이곳 사람들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유럽이나 발전 된 국가로 가기를 원하지만 비자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이곳 니제르에는 한국대사관도 없는데..

기대에 찬 아저씨의 눈빛을 차마 꺾지는 못하고 곧 한국기업이 이곳에 진출할 때 한국어와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 꼭 필요하니 익히면 도움이 될 거라 이야기 했다.

3시간을 기다린 오후 4시 버스가 출발했다. 출발 직전 자리다툼이 아주 심한데 미니버스에 사람을 거의 우겨 넣다시피 태우기 때문에 좋은 자리를 맡아야 장기간의 버스 여행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때문이다.(난 결국 1000CFA를 내고 앞좌석으로..)

출발 직후 터미널 삐끼들이 모두 차량에 붙어 운전사에게 돈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운전사는 운 좋은 삐끼에게 1000CFA, 2000CFA 지폐 하나씩 집어준다.

출발하는 차에 다닥다닥 붙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돈을 받으려는 삐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 사람들의 삶이 참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주유소에 들렸는데 1L에 640CFA가 넘는다. 기름 값이 거의 우리나라 수준이다.

와가두구까지는 500Km 거리이지만 도로가 좋기 때문에 짧으면 5시간, 길면 7시간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막상 출발을 하니 차가 자주 고장을 일으킨다. 이거 안 좋은 예감이..

오후 6시 15분 국경에 도착해서 어렵지 않게 출국 스탬프를 받았다. 국경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돈을 달라며 달려 붙는다.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명랑하게 놀고 있다가 새로운 여행자가 나타나면 달려들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돈을 달라고 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보기 싫은 풍경이다. 한창 학교에 갈 아이들을 이 지경으로 내 몬 부모와 국가의 책임이 크지 않나 싶다.

아프리카 배낭여행자의 불문율 중에 하나는 절대 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주지 않아야 한다. 불쌍하다고 돈을 쥐어주게 되면 외국인을 볼 때마다 구걸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더라도 절대 돈을 줘서는 안 된다. 단 볼펜이나 사탕을 쥐어주는 것은 괜찮다.

30분이 지났건만 버스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어가 통하는 사내에게 물어보니 버스가 자주 고장 나기 때문에 아예 버스를 교체한다고 이야기 한다.

결국 비어있는 버스와 교체를 했고, 운전자들끼리 흥정하는데 30분이 더 소요되어 1시간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옆 좌석에는 영어가 유창한 사내가 않았는데 이름은 하마드라고 소개한다.

이름으로 봐서 무슬림인 것 같고, 직업은 군인인데 10일 휴가를 내서 부인을 만나러 아비잔으로 가는 중이다. 부인은 아비잔 주재 니제르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다.

‘어? 그런데 부르키나파소에서 코트디부아르로 가는 것이 가능해?’

론니 플래닛에는 북부는 반군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그 루트로 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코트디부아르에서 부르키나로 곧장 가는 루트를 생각했으나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에 가나 쪽으로 루트를 잡았다.

‘무슨 소리? 상황은 이미 끝났어. 지금은 사람과 차가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어.’

서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는 소중한 정보임이 틀림없다.

30Km를 달려 부르키나파소 측 국경사무소가 나왔다. 국경비자는 10000CFA이고 7일짜리 비자가 나온다. 인근 대사관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국경에서 받는 것이 유리하다.

인자한 할머니가 업무를 담당하는데 꽤 친절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정확한 발음으로 이야기 하며 반가워한다.

비자 신청서 양식은 프랑스어로 되어 있지만 영어가 약간 통하는 경찰이 거의 알아서 작성 해다 시피 해준다.

비자를 받고 다시 출발하는가 싶더니 또 멈춘다. 세관원이 오늘 업무를 마쳤기 때문에 오늘은 통과할 수 없고 내일 새벽 5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짐을 챙기고 차량 주변에는 200CFA에 돗자리를 빌려주는 사람들이 붙는 것을 보니 자주 있는 일인가보다.

하루 종일 질질 끌더니만 결국 이곳에서 자야하다니.. 아까 터미널에서 7시간이면 충분히 와가두구로 간다고 하더만..

모두들 야외에 돗자리를 깔고 자지만 니아메에서 만난 캐나다 여행자가 국경에서 자다가 모든 걸 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하마드의 도움으로 국경 마을의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처음에 2500CFA를 불렀는데 시설이 엉망이라고 하니 2000CFA로 깎아준다.

여장을 풀고 곧장 식사를 하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국경마을이라 도시처럼 크게 번잡하지 않고 평화로운 시골분위기이다. 국경에 발이 묶이게 되었지만 오히려 새벽에 와가두구에 떨어져 호텔을 찾는데 온 신경을 쓰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시골 분위기를 느끼며 지내는 것이 일정상 더 좋기 때문에 더 잘 되었다는 생각이다.

식당에 가서 밥에 생선구이(300CFA)를 시키고 맥주한잔(550CFA) 들이켰다. 어느덧 부르키나파소까지 왔구나.

항상 여행을 하면서 느끼지만 내가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어릴 적에는 그저 ‘지도상으로 이런 나라가 있다.’ 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방문을 할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신나는 음악과 함께 취기어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흥겹게 들린다.


1월 19일(토)

부르키나파소는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48%의 부르키나파소인은 15세기에 가나 주변을 질주하던 기수들로 모시 제국의 후손들이다.

프랑스 식민시절부터 ‘어퍼볼타(Upper Volta)'라는 이름을 가졌었다. 1966년 독립을 했지만 이곳의 대부분 나라가 밟는 수순인 쿠데타가 일어나고 젊은 사회주의자인 토마스 산카라(Thomas Sankara) 대위가 통제권을 장악한다.

산카라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한다. 집중공격 방식으로 모든 아동에게 홍역과 황열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모든 마을에 자체에서 의사를 교육했으며 350여 개의 학교를 신설했다. 덕분에 부르키나파소는 문맹률은 50%미만인데 이정도면 이웃국가에 비해 괄목할만한 교육 수준이다.

1984년 국명을 부르키나파소로 고치고 장관의 특권을 약화했으며 니제르 국경까지 새로운 철로를 건설했고 침착하게 진행된 사회주의 정책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었으나 엘리트 그룹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1987년 쿠데타가 일어나 암살당하고 만다.

주변 나라와 더불어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며 50%의 사람들이 하루 1$의 미만의 생활을 하고 있으나 문화적으로는 아프리카 예술과 문화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매 2년마다 열리는 페스파코 영화제(FESPACO Film Festival)는 1969년에 최초가 개최됐으며 많은 발전을 거쳐 현재는 아프리카의 가장 큰 영화제로 꼽힌다.

부르키나파소를 보면 딱 떠오르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스위스이다. 지도 모양도 비슷하고 많은 나라들에 둘러싸인 작은 내륙국가라는 점. 다민족 국가로 아무런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비슷하다.

스위스는 척박한 산악지대에 아무런 자원이 없지만 국민 소득은 가장 높은 순위로 톱을 차지한다. 스위스의 주요 산업은 관광과 금융이며 유럽의 남북을 잇는 중요한 물류의 중심지이다.

부르키나파소 역시 스위스의 모델에 따라 서아프리카의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앞으로 서아프리카의 스위스가 되 보는 건 어떨지 달리는 버스에 차창을 바라보며 생각해 봤다.^^

새벽 6시 날씨가 무척 쌀쌀한 가운데 세관원이 문을 열자마자 출발을 했다.

부르키나파소는 짐 검사가 심하다고 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없다.

버스 보조원인 모루라는 청년은 기사의 지시에 따라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데 버스에는 자리가 없어 버스 위에 타야 하는데 추운날씨에 안쓰럽기 그지없다. 잠시 짬이 날 때 먹을 것을 건네니 씨익 하고 웃는다.

버스는 또 장시간 멈추는데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고 말한다. 어제와 같은 과정을 그대로 거쳐 또 갈아탔다.

와가두구(Ouagadougou)에는 오후 1시에 도착했다. 1441년부터 모시 제국의 수도이던 유서 깊은 이곳은 볼거리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대로 패스(Pass)하고 서쪽으로 360Km떨어진 보보-디울라소(Bobo-Dioulasso)로 점프하기로 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아크라에서 말리비자를 받기 정말 잘 했다. 만약 받지 않았으면 월요일까지 꼼짝없이 이곳에서 기다려야했기 때문이다.

터미널에서 가나로 가는 차편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와가두구~아크라 16000CFA, 와가두구~쿠마시 12000CFA
니아메에서 만난 캐나다 여행자는 와가두구 프랑스 대사관에서 25000CFA에 5개국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론니에는 안 나오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줬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니제르, 베냉, 토고는 확실히 들어갔음으로 서아프리카를 여행하려는 사람들은 꼭 참고하길.

도착한 터미널에서도 보보로 가는 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지만 고생고생하며 이곳에 왔기 때문에 돈을 더 주더라도 편한 버스를 타고 보보로 가기 위해 SNTB 터미널로 갔다.

SNTB 버스는 아까 터미널의 지저분한 버스와 요금이 6000CFA로 같지만 차안에 들어서는 순간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여행자를 압도시킨다.

시설은 꽤 좋으며 승객이 8명밖에 타지 않았는데도 정시에 출발한다. 승객 수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터미널에 정차하여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며 출출하면 차안에 준비된 음료와 간식거리를 사먹을 수 있다. 360Km를 4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었으며 덕분에 편한 여행이 되었다.

오후 6시 해가 지자마자 보보에 도착했다.

보보는 서아프리카를 여행자들이 쉬어가는 곳 중에 하나이다. 서아프리카 중심부에 있고 인프라가 잘 되어 있으며 복잡하지도 않아서 이곳에 쉬면서 말리, 코트디부아르, 부르키나파소 여행을 준비하는 베이스캠프로서의 역할을 한다.

보보에서는 Grand모스크 근처의 코코티엘(Cocotier)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그런데 호텔 리셉션에 들어서니 방이 없다고 하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다. 다행히 방이 하나 있는데 가장 비싼 7500CFA. 어쩔 수 없이 그 방이라도 잡으려고 하니 나보다 앞서 방을 잡았던 현지인이 6500CFA 방을 양보해준다. 종업원에게는 내일 5000CFA방으로 바꿔달라고 웃으며 부탁했다.

이곳을 방문하려는 분에게 코코티엘 호텔은 강력하게 추천한다. 숙박료도 저렴하며 (5000CFA, 6500CFA, 7500CFA) 위치상으로도 시내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둘러보거나 다음 여행을 준비하기에 좋다.

숙소안 레스토랑에서는 저렴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데 스파게티(750CFA), 소고기 스테이크(1000CFA)에 맥주(550CFA)한잔 곁들이면 꽤 배가 부르다. 맥주가 부담스러우면 커피한잔(150CFA) 곁들이는 것도 괜찮다.

호텔 리셉션에 들어서니 식사를 하려는데 프랑스 할아버지가 부른다.

조렛(joret Raymono)할아버지는 70살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이곳 서아프리카를 5개월 동안 여행하고 있으며 곧 말리로 넘어가신다.

혼자서 식사하자니 심심하다며 함께 여행이야기를 하자며 지도를 펼쳐놓고 껄껄 웃으신다. 현재 196개국을 여행했으며 앞으로 330개 나라를 다 도는 것이 목표라고 하신다. 신발 산업에 종사를 했기 때문에 한국 부산에 몇 번 방문했다고 말하신다.

330개? 내가 알기로는 세계 나라는 260개 정도인데..

할아버지는 독립하지 못한 군도와 자치 정부를 포함하면 330개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살날이 10년도 안 남았어. 그 동안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할거야.’

‘무슨 말이에요? 아직 30년은 더 남았잖아요.’

‘예끼~ 농담 두.. 난 지금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아. 죽기 직전까지 의미 있게 여행하고 싶어.’

돈에 신경 쓰지 않다고 하시면서도 저렴한 숙소를 잡으시는 것을 보아 진정 배낭여행을 즐기시는 분이 아닌가 싶다.

내가 70살이 되어도 할아버지와 같은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 대다수의 생각을 거부하고 인생의 황혼기에도 개척적인 삶을 사는 조렛 할아버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다. 정말 역동적인 인생을 사시는 분이며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는 만남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귀중한 정보를 주었는데 바로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를 거쳐 코트디부아르를 통과하셨다는 것이다.

역시나 정보가 없어 막막했는데 그곳 역시 상황이 끝났고 안전하다고 말하신다. 론니에 적힌 정보는 2005년 정보임을 감안할 때 서아프리카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고 있고, 아마도 빠른 속도로 발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보에서 쉬면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말리 여행을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