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목)

오전 5시 전화벨이 따르릉 울린다. 호텔 데스크에서 비행기 출발시각에 맞춰 모닝콜을 해준다.

두바이 공항 3층에서는 노트북으로 무선 인터넷을 공짜로 쓸 수 있다. 잠시 정보를 체크한 다음에 탑승수속을 밟았다.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비행기에 탔다. 대부분 흑인이기는 하지만 간혹 동양인들도 눈에 띄었다. 일본인과 중국인으로 한국 사람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예정 시각보다 1시간 지체 된 오전 8시 50분 이륙했는데 이륙을 하면서 두바이의 명물인 버즈 알 아랍과 인공섬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만족했다.(꼭 왼쪽 창가에 앉길..)

두바이를 벗어나자 걸프해가 보이고 곧 아라비아 사막이 보였다. 가나에 도착하기까지 사하라 사막이 이어진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몇 시간이면 통과 하지만 옛 대상들은 낙타를 이끌고 각종 위험에 시달리면서 몇 달을 걸려 통과한 곳이다. 서아프리카는 인류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기후의 변화로 사하라 사막이 사막화 되면서 외부세계와는 단절이 된다. 낙타를 이용하여 사막을 걸리기 AD4세기경에 열리게 된다. 북쪽과의 사하라 통로가 열린 이후에는 서아프리카 북쪽을 중심으로 발달 하였고 곧 이슬람의 영향을 받는다.

서아프리카의 최초의 기록은 AD 8세기 아랍인들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황금의 제국으로 알려진 고대 가나왕국이 존재하였다. 다음은 말리제국, 송가이 제국이 뒤를 이었지만 1591년 모로코가 송가이제국을 공격한 이후에는 여러 소왕국으로 분열이 된다.

흔히 서아프리카를 유럽인들의 발길이 닿기 전까지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미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15세기 유럽인들이 서아프리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들과 처음 조우를 했던 베넹, 다호메이 및 아산티와 같은 아프리카의 큰 왕국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지났다.

만약 강력한 제국이 서아프리카에 존재를 했으면 유럽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9시간을 비행해 가나 아크라에 도착을 했다. 이곳에서 승객의 4분의 3이 내려 비행기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1시간을 정비한 후 또 다시 이륙을 한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이 보인다. 대항해 시대에 꿈과 모험을 찾아 많은 유럽 선원들이 항해를 했던 그 대서양이다.

1시간을 비행해서 코트디부아르 아비잔 공항에 도착을 했다. 이제 정말로 코트디부아르에 도착을 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코트디부아르는 여행 위험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2000년대 내전이 발발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으며 남쪽은 정부군이 북쪽은 반군의 지배하에 있다. 또한 수도 아비잔은 세계에서도 치안상태가 최악인 도시 중에 하나이다.

다행히 지금은 UN의 중재로 정전협정이 맺어져 반군의 무장해제가(지연되고 있음)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여행객은 코트디부아르를 피해 부르키나파소나 말리를 경유를 한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유럽 제국이 식민지를 어떻게 나눴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아프리카 지도를 펼쳐 놓고 이 글을 읽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중앙의 가나는 골드코스트로서 영국이 활동했던 곳이다. 본격적인 식민 경쟁이 있는 1879년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화가 있기 전까지 이곳은 영국의 독무대였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를 승전국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새로운 식민지를 찾던 프랑스는 당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서아프리카를 주목한다.

물론 영국의 독식지이지만 그건 가나 지역의 골드코스트에만 한정이 되었고 식민지 보다는 무역을 통한 이익 산출에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는 서쪽의 세네갈부터 확장을 해서 말리 니제르 지역을 점령한다. 세네갈 한 가운데는 감비아가 있는데 그건 감비아강이 전통적인 영국의 활동지역이기 때문이다.

세네갈 남쪽의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 점령지였고, 이웃나라 기니는 프랑스 식민지였다.

남쪽의 시에라리온은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대부분의 많은 흑인 노예가 영국군으로 참전을 했는데 영국의 패배 후 미국에서는 갈 곳 없는 흑인을 이주시킨 곳이다.

이웃나라인 라이베리아 역시 비슷한 사연을 가진 곳으로 남북 전쟁 후 해방 된 흑인 노예중 일부가 이주를 해서 독립한 나라이다.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까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곳이다. 앞서 말했듯이 서아프리카는 유럽 세력의 등장 전에는 사하라 사막과 인접한 북쪽이 발달하였고 유럽세력이 해안에 등장하고 나서도 대서양 연안 있기는 하지만 영국의 관심은 골드코스트(가나)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노예무역으로 인한 피해는 적은편이다.

가나는 영국 식민지이고 토고는 뒤늦게 뛰어든 독일의 식민지였다. 베넹은 프랑스 식민지였고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 카메룬은 독일 식민지였다.

서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전 아프리카가 이렇듯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이 그어놓은 선에 따라 국경선이 정해지고 자연 부족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원인이 된 것이다.

아비잔에 내려 처음 받은 인상은 생각보다 깔끔하다는 것이다. 지난번 여행했던 소말리아와 비슷한 분위기일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복장이 깔끔하다.

역시 동양인은 나 밖에 없군..

여권 검사 후 옐로카드(황열병 예방 접종) 검사를 하고나서 입국 스탬프를 받았다. 환전을 해야 하는데 공항 은행에 들어가니 1$에 420세파프랑(CFR)을 부른다. 론니에는 1$에 553CFA로 써 있는데 달러 환율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30$만 환전을 하고 15Km 떨어진 아비잔으로 가기 위해 공항을 나섰다. 공항을 나서면서 나이 지긋한 삐끼가 붙는다.

영어가 유창한 삐끼는 코트디부아르에서는 프랑스어를 모르면 여행이 불가능하다며 자신이 가이드가 되어 준다고 말한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될 사람이 공항과 국경에서 친절히 다가오는 사람이라는 걸 많은 여행을 통해 습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웃으며 뿌리치려고 했다. 그렇지만 끈질기게 따라온다.

삐끼 아저씨는 아비잔으로 가는 버스는 없다고 말하며 택시를 타라고 말한다. 론니에도 버스에 관한 정보는 없는데..

그러나 공항에 버스가 없는 나라는 존재 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공항에 종사하는 직원과 주변 마을 사람을 위한 버스는 있기 마련인 것이다.

공항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삐끼 아저씨는 정류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가 오지 않는다며 거짓말을 한다.

결국 삐끼 아저씨를 뿌리치기 위해 공항 안을 빠져나와 외부로 이어진 도로를 걸었다. 결론적으로 공항 안에서 75번 버스를 타면 되지만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2Km를 걸었다.

공항 도로를 빠져나오자 수많은 차량이 지나간다. 버스정류장이 어디인지 물어봤지만 도통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주변의 간판도 모두 프랑스어인데..

다행히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학생의 도움을 받아 아비잔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비는 200CFA. 1$당 420CFA를 기준으로 하면 한 450원 정도.

버스는 아비잔 외곽에서 멈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학생의 도움으로 아비잔 시내 중심인 Plateau 지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코트디부아르는 우리에게 축구를 잘하는 나라로 익숙하다.

잉글랜드리그의 첼시의 간판 골잡이 디디에 드로그바를 비롯해 코네, 아갈레와 같은 유명 공격수를 보유하였고, 칼루, 조코라, 파예, 티아네 등 유명 클럽에서 미드필더에 투레, 에부에 같은 명수비수가 코트디부아르 출신이다.

그러나 코트디브아르는 1960년 독립후 경제 대국이었다. 프랑스령 서아프라카 국가중에서 가장 발전했으며 커피 생산은 세계 3대국에 들어갔고 코코아 생산도 1979년에는 세계 제1위의 수출국이 되었으며 파인애플과 야자오일의 수출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였다. 한때 디브와르의 기적으로 이어지며 주변국의 부러움을 샀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곡물 가격의 폭락과 관료의 부패가 대통령인 우프에트 브와나의 철권통치와 맞물려 심한 경제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1999년에는 정권을 이어받은 코난 베리와 북부 이슬람 반군 간에 전쟁이 발발한다. 잘 살았던 나라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도 꼭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아비잔은 1951년에는 인구가 6만명에 불과했지만 브리디 수로의 완성이 된 후 해양과 연결되면서 급속한 발전이 이뤄졌다. 인구는 3백만으로 폭등했으며 아프리카의 파리로 불리며 많은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인접국가에서 이주한아프리카인들이 살고 있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공항 방향에서 다리를 건너 Le Plateau 지역에 도착을 하니 고층의 빌딩이 늘어서 있다. 고층빌딩을 감상할 새도 없이 숙소를 찾아야 했다.

관광객이 거의 없는 지역이니만큼 싼 숙소를 찾기기 힘들었다. 론니에는 가장 저렴한 숙소가 12000CFA라고 되어 있지만 그마저도 거리가 멀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도통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시내 중심가에는 인적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범죄율을 자랑한다던데..

숙소를 잡는 것이 우선이다. 정 안되는 경우는 카드를 써서 고급호텔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Km 정도를 걸어 아자메(Adjame)지역에 들어섰지만 호텔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싼 호텔을 물으니 영어가 조금 통한다.

아저씨는 미니버스를 함께 타고 반푸라 호텔로 안내해준다. 방구라라.. 이름이 좀 이상하다. 얼핏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기억이 되는 이름이다.

함께 온 아저씨가 리셉션에서 현지어로 뭐라고 이야기 한다. 아무래도 커미션을 챙기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값싼 호텔로 데려다 줬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처음 12000CFA를 불렀는데 8000CFA(공항 환율로 20$가 약간 안 됨)로 깎을 수 있었다. 커미션을 제외하면 더 싸다는 이야기이다.

호텔 방은 에어컨과 욕실이 딸려있다. 이 정도면 만족.

호텔 주변은 시장의 시작점에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장을 보고 있었다. 둘러보면서 대충의 물가를 가늠해 보았다. 볼펜과 콜라 한 병을 함께 사니 350CFA, 오렌지 3개가 100CFA이고 바나나 3개도 100CFA이다.

시장을 둘러보고 호텔에 돌아와 밀린 빨래를 했고 말라리아 약을 복용했다.

말라리아 약은 1주일에 한번 복용해야 하는데 약발이 꽤 센 탓인지 이내 잠들었다. 서아프리카 여행의 첫 스타트도 힘겹게 지나갔다.

혹시 아비잔을 여행하는 이들 중에 저렴한 숙소를 찾지 못했으면 반푸라 호텔 주소를 쓸 테니 활용하기 바란다.

Hotel Banpora(정확한 이름은 아님. 반푸라라고 발음)
주소- 03BP 1714 Abidzan 03(무슨 뜻이지 모르지만 이렇게 써 줬다.)
전화번호- 20-38-7422(전화가 더 편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