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화)

드디어 이리안자야로 가는 날이다. 오전에는 그동안 밀린 여행기를 정리하고, 이리안자야를 여행할 때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마랑에 있으면서 정작 시내 관광은 하지 못했는데 네덜란드 통치 시대에 지어진 건물을 중심으로 시내 사진을 찍어 두었다.

오후 2시에 정들었던 게스트하우스 직원들과 작별을 하고 수라바야로 향했다.

수라바야 국제공항에는 오후 6시쯤 도착했다. 오후 10시 비행기니까 아직 4시간 정도 남았다.

어제 긁힌 상처 때문에 공항 보건소에 가니 왜 이렇게 많이 긁혔는지 물어본다. 영어로 어떻게 답할지 몰라 브로모 화산 근처 정글에서 헤매다가 긁혔다고 하니 ‘정글?’이라고 대답하며 어이없이 웃는다. 내가 생각해도 대답이 참 궁색하다.

보건소에서 연고와 항생제를(80,000루피아) 처방해주며 자세한 사용법을 알려준다.

이리안자야 여행이 끝날 때쯤에 소롱(Sorong)에 있을 텐데 그곳에서 말레이시아 행 비행기를 예약한 Manado(마나도)를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니 가장 저렴한 티켓이 1,179,000루피아(118$)이다. 자야푸라에서 소롱 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건데..

지금 구입하기 보다는 상황을 보고 자야푸라에서 비행편을 더 알아보고 구입하기로 했다.

시간이 되어 체크인을 하니 공항피 30,000루피아(3$)를 받는다. 공항 안으로 들어서니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하고 있다. 이곳 역시 신종 플루에서 안전지대가 아님을 알려준다.

비행기가 출발하자마자 기내식이 나오는데 빵 두 조각과 비닐 컵에 담긴 물이 전부이다. 중간에 마카사르(Makassar)에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는데 이 때는 기내식이 오믈렛에 주스가 나온다.


7월 29일(수)

오전 6시 반 자야푸라에 도착했다. 아니 자야푸라 근교인 센타니(Sentani)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자야푸라까지는 35Km 떨어져 있다.

인도네시아는 시간대가 3개로 나눠지는데 수마트라와 자바는 우리보다 2시간이 느리고 술라웨시와 발리는 1시간 이곳 파푸아는 우리와 시간이 동일하다. 경도상으로는 자야푸라가 우리나라보다 더 빠른 시간대에 있다.

이리안자야에서 가장 알려진 발리엠 계곡(Baliem valley)로 가기에 앞서 돌아가는 항공권을 확보해야 하기에 일단 자야푸라로 향했다.

센타니에서 자야푸라로 가는 과정은 2번 차를 갈아타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정이다. 더구나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차량 운전수를 이해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다행히 영어가 능숙한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자야푸라로 가는 방법과 이곳 정보에 대해 어느 정도 물어 볼 수 있었다. (차량비 총 14,000루피아 들었음)

자야푸라는 한 지역의 주도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항구도시이지만 아름다운 항구이다.

먼저 경찰서에 들러 여행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허가증을 만드는데 필요한 사진 두 장과 여권 카피본을 미리 준비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허가증(10,000루피아)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허가증을 만들 때는 들를 도시를 다 표기해야 하기 때문에 계획이 없더라도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표기하며 날짜 역시 넉넉하게 기간을 잡는 것이 좋다.

허가증을 받고 Pelni 사무실로 갔다. Pelni는 인도네시아 전역을 운행하는 페리 회사로 여러 대의 크루즈를 보유하고 있다. 보통 1~2주에 한번 꼴로 항구에 들리기 때문에 스케줄만 잘 맞추면 이용할 수 있다. 각 항구별 요금표는 혹시나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정밀하게 사진으로 기록해 두었다.

Pelni에 가니 8월 3일 자야푸라를 출발해 소롱(Sorong)~암본(Ambon)으로 가는 페리와 8월 10일 소롱(Sorong)~떼르나뜨(Ternate) 방향으로 출발하는 페리가 있다. 발리엠 계곡(Baliem valley)에서 시간이 오래 소요 될 것 같기 때문에 8월 10일에 출발해 떼르나뜨까지 까지 가는 승선권(395000루피아)을 구입했다.

자야푸라에서는 할 일이 끝났다. 페리를 탈 때쯤 다시 찾게 되겠지. 다시 아까와 같은 과정을 거쳐 센타니로 돌아왔다.

발리엠 계곡(Baliem valley)의 중심인 와메나(Wamena)는 센타니에서 225Km 떨어져 있다. 통하는 길은 전혀 없으며 오로지 비행기로만 이동이 가능한 오지이다.

와메나로는 트리가나(Trigana)에어를 일반적으로 이용한다. 하루에 4편 뜨며 와메나로 가는 가장 저렴한 항공이다. 나머지는 선교사(MAF)가 이용하는 항공인데 가격이 비싸고 하루에 뜨는 항공이 많지 않다.

공항에서는 센타니에서 와메나까지 825,000루피아(82$)였는데 론니에는 비싸봐야 450,000루피아(45$)라고 했기에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공항 근처의 오피스에서는 같은 가격을 불러서 일단 짐을 맡기고 환전도 할 겸 시내에 있는 트리가나에어 사무실로 향했다. 시내로 가는 길에는 은행들이 늘어서 있는데 한결같이 환전하기를 거부한다. 기계가 고장 났다거나, 원래 환전이 안 되는 은행이라는 둥.. 다섯 번째로 찾은 은행에서야 센타니는 환전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직원의 솔직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시내의 트리가나 오피스에서도 아까와 같은 가격을 부른다. 그것도 오늘은 마감되었으며 빨리 예약하지 않으면 내일 것도 장담 못한다고 이야기 한다.

결국 두 배 정도의 가격은 성수기이기에 형성된 것이다. 관광객은 거의 없지만 현지인들이 8월 9일에 있는 축제에 맞물려 와메나로 몰리는 듯하다. 시내에서의 볼 일이 끝난 후 시내버스와 같은 쉐어 택시를 타고 공항 쪽 오피스에서 배낭을 찾으며 내일 와메나행 항공권을 발권했다.

밤새 비행기를 탄 후 내리자마자 연거푸 분주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더위와 맞물려 짜증이 몰려왔다. 이때는 호텔을 빨리 잡아 쉬는 것이 최선일터.

공항 바로 옆에 Semeru 호텔이 있는데 찾아가니 종업원이 150,000루피아를 부른다. 좀 깎아 줄 수는 없는지 물어보니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고 일축하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대뜸.

‘ 안녕하세요.’
‘.... !’

인사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한국인 관광객이 아예 없다시피 한 이곳에서 어떻게 한국말로 인사를 할까?

종업원은 센타니 국제 고등학교(International High School)에 한국인 선생님이 계시는데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말을 알려준다고 하신다.

이곳에도 한국인이 살고 있을 줄이야. 이곳 사정도 알 겸 꼭 만나 뵙기로 했다. 종업원에게 국제 고등학교를 물으니 친절하게도 자세히 약도를 그려주면서 알려준다.

숙소에 배낭을 던지고 곧장 밖으로 나섰지만 오늘 아침에서야 처음 온 이곳에서 학교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

다행히 지나가는 고등학생에게 물어보니 고맙게도 국제 고등학교까지 같이 가 준다. 고등학교에 가서 경비원에게 한국인 선생님을 물으니 학교에 안 계시고 숙소에 계신다고 하며 언덕 위의 하얀 집을 가리킨다.

꽤 먼 거리인데..

거리도 거리지만 이 더운 날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푸느라 20분 정도를 같이 걸어온 애꿎은 고등학생 세 명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근처 가게에서 시원한 콜라 한 캔씩 사주니 무척 좋아한다. 목을 축이면서 학생들에게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 하니 한 학생이 언덕 위의 집이 자신의 집 방향이라며 함께 가겠다고 한다.

학생과 헤어져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을 오르고 나서야 다다를 수 있었다.

인기척이 있는 건물에 들어가니 한참 영어 수업 중이다. 다행히 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한국인 선생님 집의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한 아이가 나온다.

‘저기 한국인 선생님 댁인가요?’

화들짝 놀란 아이는 ‘엄마’하며 집안으로 뛰어 들더니 한국 사람이 왔다며 연거푸 부모님을 부른다.

놀란 표정의 선생님에게 웃으며

“ 안녕하세요. 전 일리안자야로 여행 온 여행자인데요. 이곳에 한국인이 사신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아.. 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몇몇 단체에서 찾아오기는 했지만 여행자가 오기는 처음이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가족들 모두 놀란 눈치이다.

사모님은

“이모~ 일루 올라와봐. 정말 신기한 볼거리 있어.”

한 여성분이 올라오더니 깜짝 놀란다.

“혹시.. 외계인 아니죠? 아님 이북에서?”

이 들에게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의 존재는 꽤나 충격적 이었나보다. 신기한 눈빛으로 주목하며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묻는다.

한국인 선생님 가족은 이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에는 247개 언어가 있는데 각 부족마다 언어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한다. 때문에 각국 선교사들이 각 부족에게 문자와 문법을 만들어주고 성경을 그 부족 언어로 번역을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인적 사항은 혹시나 선교활동을 하시는데 지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표기하지 않겠다.

선교사님 가족은 이리안자야 북쪽의 부족 마을에서 성경 번역 작업을 하고 계시며, 아까 이모라고 불린 여성분은 남쪽 부족의 성경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있으면 보통 지나치는 분들이지만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에서는 금새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선교사님에게 들은 내용과 미리 준비한 자료를 통해 이리안자야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리안자야(Irian Jaya)는 1511년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으며 그들은 포르투갈 어로 '곱슬머리의 섬(Island of the Fuzzy Hair)'을 뜻하는 IIhas dos Papuas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발견이후 일찍이 쇠퇴기를 맞이한 포르투갈을 대신해 네덜란드 세력이 들어왔으며 흑인에 곱슬머리인 이곳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기니 사람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뉴기니(New Guinea)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을 두고 영국과 마찰을 빚다가 결국 1824년 뉴기니 섬을 반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영국령인 서쪽은 지금의 파푸아 뉴기니가 되었고, 네덜란드령인 서쪽은 지금의 인도네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리안자야는 남한면적의 4배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지만 인구는 270만인 인구 희소지역이며 그나마도 300~400여 종족이 각기 다른 언어로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인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계속 식민지로 삼기 위해 1945년부터 수카르노가 이끄는 독립군과 4년 동안 전쟁을 했다. 당시 4만이 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카르노는 미국과 UN의 압박해 네덜란드로 하여금 독립을 승인하도록 했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후에도 네덜란드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새로운 식민제국을 재건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와의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었으며, 1962년에는 양국 군대의 무력충돌을 빚었다.

1962년 8월 UN의 중재에 따라 결국 네덜란드가 양보하였으며 1969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실시된 주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인도네시아에 귀속하기로 결정되었고, 11월 UN총회에서도 그 결과가 승인되어 인도네시아의 26번째 주가 되었다.

이리안자야는 2002년에 파푸아(Papua)주로 변경되었으며 2003년에는 파푸아주의 서쪽 일부분이 서이리안자야(West Irian Jaya) 주로 분리되었다.

현재 독립운동 움직임이 있지만 인도네시아는 영토의 20%를 차지하며, 전체 자원의 70%를 차지하는 이곳을 인도네시아 인구의 1% 밖에 안 되는 파푸아족의 독립국으로 인정 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독립 움직임에 대해서는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진압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푸아 민족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다른 섬과는 달리 한 번도 강력한 왕국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아니 가질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해야 하나..

바로 옆 마을이라고 해도 구역을 조금이라도 침범하면 부족 간의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부족 간의 교류라는 것이 없었으며 국가와 종교 또는 파푸아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없으며 역사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결국 교류라는 것이 없으며 오로지 부족이라는 틀 안에서 수 천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바로 이웃 부족이라도 언어와 풍습, 생활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며 부족끼리 철저하게 고립되었고 지금도 신석기 시대의 수준 문화로 살고 있는 부족이 많이 있다.

선교사님들에게 이곳 선교활동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이뤄지고 있는 작업이지만 이곳 선교 활동 초창기부터 부족을 찾아서 언어 계열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 제일 첫 작업이며 이 작업은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예전에는 정글을 헤치고 카약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부족을 찾았는데 이 때 많은 선교사들이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했다.

지금은 항공기와 헬기를 타고 다니며 마을이 보일 때마다 GPS로 위치를 찍은 후 인도네시아어가 통하는 부족 통역원을 대동해서 다시 찾아간다. 가끔 마을이 옮겨져 허탕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선교사가 마을에 찾아가서 머물 집을 지은 후 그 부족의 언어를 배운다. 언어를 배우고 나서 체계적인 문자와 문법을 만들고, 부족에게 보급한 다음 성경 번역을 한다.

육로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오직 헬기와 비행기만으로 이동이 가능한데 세계에서 단 두 대뿐인 수상 경비행기도 이곳에 한대 있다고 한다. 한 단체가 하기에는 힘든 작업이기 때문에 각 국 선교사들이 연합해서 선교사 항공을 설립해서 지금의 MAF, AMA 선교 항공사를 만들어 이리안자야 구석구석을 누빈다.

선교사는 마을에 있으면서 마을 공동시설(주로 비행장)을 만들고 약을 비롯한 구호물자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활동하며 좀 더 정착이 되면 교육활동을 펼쳐 현지인 교사를 양성하다가 1달 정도 휴식기를 갖는다고 한다.

아까 이모라고 불린 여선교사님은 4주 동안 휴식기에 있는 중이었다.

문명화 되지 않은 원주민과 살고 있으며 워낙 오지이기 때문에 위험한 활동이다. 때문에 선교사들은 연락체계를 만들었는데 하루에 한번 무전을 해야 하는데 만약 3일 연속으로 무전이 없으면 선교사가 있는 지역으로 무조건 경비행기가 뜬다.(비용은 해당 선교사 부담)

선교사님들은 우리 마을 하면서 각자 마을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는데 여선교사님의 마을은 남쪽 늪지대라 산악 지역보다 열악하다.

주변 부족 중에서 가장 약한 부족이기 때문에 항상 꽁꽁 숨었으며 선교사님이 마을에 오기 전에는 숲 안에서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밖에서는 결코 이 마을을 찾지 못한다고 한다.

숫자는 5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숫자를 세는 방식도 첫째 손가락, 둘째 손가락, 5가 넘어가면 왼쪽 첫째 손가락, 둘째 손가락, 10부터는 오른쪽 귀 , 왼쪽 귀.. 이런 식으로 숫자를 센다. 부족마다 차이는 있지만 숫자를 세는 방식은 비슷하다고 한다.

20년 전까지 식인 풍습이 있었는데 전쟁을 해서 죽인 사람을 먹어야 죽은 사람의 영혼이 마을에 겉돌지 않고 빠져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전쟁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만약 누군가 영역을 침범하면 처음에는 부족 언어를 숲 속에서 이야기를 건네는데 어느 정도 알아들어 상대가 대답을 하면 그 부족원이거나 친척이기 때문에 통과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죽이며, 그건 곧 전쟁의 시작이다.

이곳 부족의 전쟁은 개미의 전쟁과 비슷하다. 개미는 전쟁을 벌이게 되면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상대를 모조리 죽여야 전쟁이 끝난다.

지각이 있는 인간이라 개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선교사님의 마을의 정전 협정 방식은 끔찍하다. 정전을 하려면 전쟁을 일으킨 종족의 남자 아이를 상대 부족에게 주어야 하며 상대 부족은 그 아이를 죽임으로서 전쟁을 끝낸다고 했다.

실제 여선교사님은 그렇게 두 아들을 상대 부족에 줘 죽게 만든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이야기해 주셨다. 워낙 약한 부족이라 먼저 전쟁을 벌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상대에게 내 줬다고 말씀하신다.

혼인은 부족마다 차이가 있는데 같은 부족 내에서 결혼하는 경우와 다른 부족과 결혼하는 경우가 있지만 만약 대책 없이 다른 부족의 여자를 임신 시키면 문제가 커진다.

남자가 임신 시킨 여자와 결혼을 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남자 쪽 부족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남자가 결혼을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 마저도 녹녹치 않은 과정이다. 이곳에서 여성은 주 노동력이기 때문에 한쪽 부족이 다른 부족의 여자를 데려가면 반드시 여자를 채워 넣어야 한다.

즉 결혼을 하게 되면 여동생이나 친척 중에 여자를 상대에게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만약 남자 형제 밖에 없는 집안이면 다른 친척에게 부탁을 해서 시집을 보내든지 아니면 형제 중에서 딸을 낳아서 키운 후 시집을 보내든 어떻게든 여자를 채워야 한다.

선교사님들이 경비행기가 이룩할 수 있는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현지인들을 고용하면 여자들은 아기 들쳐 없고 낑낑대며 열심히 일하지만 남자들은 항상 잡담을 하며 일을 거의 하지 않는 다고 한다.

마을에서 모든 노동은 여자가 하며 남자는 사냥과 전쟁을 담당했다. 만약 부족 간 전쟁이 일어났는데 남자가 겁이 나 전쟁을 하지 않으면 여자들이 가만있지 않고 등 떠밀다시피 전쟁에 내 보낼 정도로 여자들의 기가 세기도 하다.

이곳은 항상 비슷한 기온과 강수량이기 때문에 나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럴 때면 ‘혹시 가운데 빨간 원이 그려진 항공기(일본군)’ 비행기 본 적 있나요?’라는 질문으로 나이를 측정한다.

구석기 시대에서 멈춰 있던 이곳에도 인도네시아 점령 이후에는 변화가 생겼다. 군인들이 각 마을에 들이닥쳐 목줄을 감긴 채 끌고 가 총을 겨누며 일을 시켜 마을을 만들게 했다.

조금씩 문명화 되고는 있지만 아직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며 많은 도움이 필요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곳에서 활동하시는 선교사분들이 계시는데 여행자인 난 잠시 스쳐가는 것이지만 선교사님들은 이곳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이리안자야 사람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며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여행기에 다 담지 못할 정도 ^^;;)

선교사님은 사진 자료와 비디오 자료를 보여주시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으며 댁에서 오랜만에 한식을 먹을 수 있었고 저녁에는 집 앞 모닥불에서 저녁 식사까지 얻어먹었다.

집은 주변이 훤히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데 처음 수풀에서 이곳을 지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지만 점차 이곳이 발전을 함에 따라 지금은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한 건물을 지을 때는 2차 세계 대전에 맥아더 장군이 주변 정세를 살폈던 표지석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선교사님은 와메나에서 나올 때 경비행기를 예약해 주신다고 한다. 이거 생각지도 않게 경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사모님께서는 호텔까지 차로 데려다 주시며 조심해서 여행하라고 하신다. 호텔에 돌아오니 오후 8시이다.

호텔 침대에 누워 벽 사이를 기어다니는 개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여기는 세계적인 오지 중의 오지. 여행한 사람이 거의 없는 그런 곳. 그 곳에 지금 내가 서 있다.

오늘 선교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곳 사람들에 대해 배웠으면 내일은 직접 만나러 간다. 이 곳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 올까? 또 어떤 추억들이 날 기다릴까?

그 들과의 만남.. 대학 시절 미팅 직전의 설레임과 같은 감정이 지금 나의 가슴 속에서 요동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