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수)

자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인 이란이다. 세계 최초의 이슬라믹 국가이자 폐르시아의 불사인의 후손들의 나라.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지역이지만 실크로드 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오아시스 도시가 번성하였던 나라.

여행을 하다가 종종 이란 사람들을 만나곤 했는데 모든 이란 여행자들이 나에게 공통적으로 한 말이 있다.

‘Iran is very Beautiful'을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나에게 했던 것이다.

과연 어떠한 나라이기에 그토록 국민들 스스로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까?

사실 이란은 3년 반 전 나의 첫 해외여행 때 올 뻔했다. 당시 중국~파키스탄~이란~터키를 목표로 삼았었는데 파키스탄 비자(무비자인줄 알고)를 받지 않아 국경에서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대신 티벳을 여행했음)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넘어오자 나를 맞이해주는 건 친절한 군인들이다. 한국인인 나를 웃으면서 맞이해주었으며 세관 검사도 까다롭지 않았다.

화장실을 물어보자 직접 화장실까지 안내해줄 정도이니..

스탬프를 받으면서 ‘Welcome To Iran'이라는 말이 정말 듣기 좋았다.

영어를 좀 하는 이란 아저씨와 2명의 투르크멘인 아줌마와 함께 프라이드를 타고 마사드로 향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대우 티코가 장악하고 있다면 이란은 기아의 프라이드가 장악하고 있다. 머나먼 이국에서 자신의 나라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민들은 얼마 없다.
산악지대를 벗어나자마자 끝없는 사막이 펼쳐진다. 프라이드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고..

2시간이 지나 쿠찬(Quchan)에 도착했다. 여기서 나와 계속 대화를 나눈 이란 할아버지는 테헤란을 향해 떠나고 프라이드는 또 다른 한사람을 태워 150킬로 정도 떨어진 마사드(Mashhad)로 향한다.

마사드에 도착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론니플래닛 이란 편을 준비를 안했기 때문에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론니가 없더라도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환율과 숙소 정보, 관광지 정보조차 없다.

인터넷을 통해 마사드가 이란 이슬람의 성지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무엇보다 지금 밤이고 비가 와서 이것저것 알아볼 요량이 없다.

이상하게 이번 여행에서는 방문하는 도시마다 자주 비와 눈이 온다. 처음 키르키즈 비쉬켁에서부터 그러더니 오쉬, 누크스, 사마르칸트, 부하라, 아쉬하바르, 코니에 우르겐치 등...

혹시 내가 비와 눈을 몰고 다니는 걸까?

일단 1$에 9000리얄이라는 은행직원의 말을 듣고 프라이드 운전자에게 50달러를 400000리얄에(나머지 50000는 국경~마사드 차량 비)을 환전했다.

그리고 곧장 테헤란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80000리얄) 이란에서의 첫날은 이처럼 버스에서 지내게 되었다.


1월 26일(목)

잠이 깨니 버스는 사막 위를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버스 앞좌석으로 옮겨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감상했다.

갑작스러운 외국인의 등장에 운전사는 차 한잔하라며 발밑의 보온병을 가르킨다.

마사드에서 꽤 먼 거리를 달려왔음에도 여전히 비가 오고 있다.

중간 검문소에서 잠시 버스가 멈췄는데 화장실을 가기 위해 버스에서 잠시 내렸다.

급히 볼일을 보고 버스 쪽으로 가니 내가 탄 버스가 떠나고 있는 것이다. 급히 달려가 버스를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무심한 운전사는 나를 보지 못했나보다.

노트북을 비롯해서 모든 짐이 다 버스 안에 있는데..

검문소에서 내 사정을 들은 다른 버스 운전사가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나를 태우고 빠른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버스 안에서는 발랄한 이란 사람들이 걱정 말라며 나를 달래준다. 그들 덕분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20분 정도의 추격전 끝에 앞 버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경적을 울리니 영문 모른 앞 버스 운전자는 급히 버스를 세운다.

사정을 들은 운전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한다. 일단 뒷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위기의 순간을 넘긴 뒤 한참을 달려 마사드에서 출발한지 16시간만인 오전 11시에 테헤란에 도착했다.

문제는 지금부터.. 도대체 론니 플래닛을 어디서 구하지?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고 무엇보다 빗줄기기 더욱 굵어졌다.

일단 시내를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 가다보면 시내가 나타나겠지..

테헤란은 그야말로 교통지옥이다. 많은 차량들이 거의 줄서다시피 하고 이리저리 끼어들기를 비롯해서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는 공격적인 운전이다.

외형이 온전한 차량은 거의 보기 힘들며 각종 고물차들이 내뿜는 매연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테헤란의 공해는 세계적이다.)

비를 쫄딱 맞으며 2시간을 걸었다.

시내는커녕 아직 외곽도 못 벗어난 것 같은데 과연 론니플래닛은 오늘 안으로 구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주로 하던 오락실 게임 중에서 ‘원더보이’라는 게임이 있다. 주인공이 돌도끼로 적들을 해치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임인데 자칫 돌도끼 아이템을 놓치면 쉬운 적들도 해치울 수 없게 되어서 쩔쩔매며 적들을 점프로 피해 다녀야 한다.

지금 내 모습이 그런 것 같다. 돌도끼(론니)가 없어서 쩔쩔매며 헤매고 있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준비해둘걸..

일단 길도 묻고 식사도 할 겸 식당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쫄딱 비 맞은 외국인의 등장에 모두가 당황한 모양.. 갑자기 식당 안이 시끌 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영어를 해도 통하지 않아 노트북을 꺼내서 길을 묻자 사람들이 화가 난 표정이다.(왜 그러지?) 주인은 어서 먹고 나가라고 한다.(노트북 꺼낸 게 실수다..)

식사를 거의 못한 채 나가려고 하자 한 청년이 나를 끌며 따라오라고 한다.

그와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자 청년은 길 건너 사진관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거기서 대략적이나마 이란을 여행할 영어로 된 책을 구하고 있다는 의사를 청년에게 전할 수 있었다.

청년은 일단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과일과 차를 대접해 주면서 젖은 몸과 옷을 말리게 해줬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청년의 배려에 정말 감격했다. 청년의 이름은 샤힛이며 아내와 3~4살 정도 된 딸, 이렇게 3식구가 살고 있다.

10분 정도 있으니 샤힛의 동생인 듯한 젊은이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차가 있었는데 그 차를 타고 근처의 테헤란 대학으로 갔다.

테헤란 대학 도서관에 가서 영어로 된 가이드북을 찾았지만 없다고 한다.

다시 동생차로 시내로 들어선 후 버스로 갈아타고 30분 정도를 갔다.(말이 30분이지 교통 정체 때문에 이동한 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음)

버스에서 내리니 거리에는 많은 서점들이 줄지어 있다.

샤힛은 책들을 주로 파는 바자르(시장)이라고 말하며(물론 몸짓으로) 나를 데리고 영어로 된 책들을 파는 서점을 찾았다.

결국 론니플래닛 이란 편을 55000리얄(복제본 6000원)에 살 수 있었다.

3시간 동안 낯선 나를 안내해준 샤힛이 너무나 고마웠다.

샤힛에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대접(52000리얄)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샤힛이 어디로 갈 것인지 묻기에 숙소가 모여 있는 이맘 호메이니(Imam Khomeini)역으로 간다고 했다.
샤힛은 같이 가주겠다며 내 배낭을 대신 매준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하며 다시 배낭을 뺏으려고 해도 막무가내.. 길안내는 물론 배낭까지 매주는 샤힛이 너무나 고맙다.

테헤란에서 론니를 구했으니 다음 할일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구하는 것..

항공권 가격을 물으러 근처 여행사를 들렀다. 샤힛은 잠시 담배를 피고 오겠다고 한다.

여행사 직원에게 2월 4,5일 쯤에 떠나는 서울행 비행기를 알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아차.. 샤힛이 내 배낭을 들고 있지? 혹시..

급히 밖으로 나서니 샤힛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혹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배낭 맨 키 큰 청년을 못 봤는지 물어보니 다들 모르겠단다.

혹시나..

5분, 10분을 기다릴수록 초조함은 더해가고..

20분이 지났을 무렵..

정말 인정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하는 현실...

배낭을 도둑맞았다..

여권, 돈, 사진기는 몸에 지니고 있었지만 배낭 안에는 여행 중 애지중지하던 노트북이 있다.

아..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여태까지 쭉 잘하다가 이렇게 막판에 당할 줄이야.

되기만 한다면 다시 1시간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내가 왜 배낭을 멜 생각을 안 했을까? 왜 론니를 미리 준비 안 했을까? 왜 그 식당에 들어갔을까? 왜 마사드에서 하루를 묵지 않았을까?

수많은 후회들이 몰려왔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일단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근처 경찰서로 갔다. 경찰들과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마침 폭력사건으로 잡혀 온 영어가 통하는 청년을 통해서 내 사정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경찰은 말도 안통하고 어느 장소인지도 모르고 막무가내 상태에서 찾아온 외국인이 안쓰럽고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한국 대사관이랑 통화를 하니 영사는 현실적으로 배낭을 다시 찾기는 힘들지만 혹시 모르니까 일요일에 와서 사건 접수를 하라고 한다.

경찰서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위로한다. 심지어 폭력사건으로 끌려온 청년부터 얻어맞아서 경찰서로 온 중년 신사까지 나보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정말 고맙기는 하지만 그런 배려는 귀에 안 들어온다.

경찰서에 3시간 동안 있었지만 도대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현실을 인정하고 숙소를 잡기로 했다.

시내의 한 호텔(130000리얄)에 들어갔다. 호텔비가 비싸기는 했지만 한글 인터넷이 되어서 내 사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론니플래닛을 산 서점에서 받은 비닐봉지 하나.. 그 안에 론니 이란, 중앙아시아편만 있을 뿐이다.

말로만 듣던 봉지 여행을 지금 하게 되는군..

안타깝지만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나마 여권, 돈은 고스란히 있고, 여태까지 적은 여행기는 홈페이지에 다 올렸고, 사진 또한 디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렇게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마음을 추스렸다.

호텔에는 여행을 온 중국인들이 있는데 그들과 여행 중국어로 즐겁게 떠드니 좀 위안이 된다.

이미 여행에 대한 의지는 완전히 꺽였다.

자꾸 샤힛이 잠시 담배피고 온다고 사라진 순간이 떠오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쁜 놈.. 이렇게 물건을 훔치려고 그렇게 친절하게 다가서다니.. 노트북도 노트북이지만 정신적인 충격도 만만치 않다.

내 스스로도 여태까지 너무 자만을 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렇게 방심을 부르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여행하면서 두고두고 새겨둘 것이다.

일단 정든 노트북에 대한 예의는 다해야겠지? 한국 대사관에 사건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많이 넘겨줘야 범인을 잡을 가능성이 그나마 커지겠지.

아침부터 있었던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특히 처음 테헤란에 들어설 때와 샤힛과 만난 레스토랑..

‘ 키는 185cm 정도이고, 아내와 3~4살 된 딸과 함께 지하 단칸방에서 살고 머리는 약간 벗겨지고 콧수염이 있는 남자, 처음 만난 레스토랑에서 북서쪽으로 300m 반경 안에 집이 있다. 그의 동생은 하얀색 고물차가 있다.’

‘집안까지 나를 안내해준 것을 보아서 우발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크고, 여행 전 노트북 DVD콤보를 빼두고 왔기 때문에 이곳 언어로 된 윈도우를 다시 까는 것은 힘들고, 윈도우를 깔기 위해서는 후지쓰 노트북을 전용 DVD콤보를 구입해야 한다.’

‘배낭 안에는 캐비어가 있기 때문에 친구들을 불러 놓고 갑작스럽게 캐비어 파티를 했을 가능성도 있음.’

여러 단서들을 머릿속에 정리를 했다. 내일 하루 더 단서를 찾아보고 일요일에 대사관에 자료를 넘긴 후 곧바로 귀국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