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목)

오전 8시 서안투어에 참가하려고 호텔 로비에 가니 한국인 여행자 3명이 있다. 반갑게 말을 거니 즐겁게 받아준다.

룩소르는 고대에 테베라고도 불렸는데 이집트 고왕국 때에는 지방 촌락에 불과했지만 기원전 2000년경 아메넴헤트 1세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찬란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일강 하류인 델타지역이 경제 무역의 전면에 나섬으로서 슬슬 쇠퇴하고 시작하더니 기원전 7세기경에는 앗시리아인에게 약탈을 당했고 기원전 27년에는 지진이 발생해 도시를 심하게 훼손시켰다. 그 후 오랜 세월동안 로마인, 기독교인, 아랍인들에 의해 훼손이 되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어진 도시가 되었다.

1718년 테베의 존재가 알려지고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테베는 고고학 도시로서 새 생명을 얻게 된다.

룩소르는 나일강을 기준으로 서안과 동안으로 나눈다. 서안에는 왕가의 계곡을 비롯한 대부분의 볼거리가 있으며 동안은 도시와 숙소가 몰려있다.

서안의 볼만한 유적지는 몰려있는 편이라 자전거나 걸어서 관람하는 여행자도 있지만 45도가 넘는 땡볕은 생각하면 차량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이집트에서의 투어는 네크웍이 잘 되 있어서 호텔에서 한명이 신청을 하더라도 다른 호텔 여행객과 합쳐서 여러 명이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가이드도 포함이 되어있다.

상당히 괜찮은 체계라고 생각되는데 덕분에 미국, 일본, 브라질 여행자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인도인 할머니가 동행했는데 혼자서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시며 다음 여행지는 케냐라고 말하신다. 차안의 모든 여행자는 국적을 불문하고 존경스러움을 표현하며 같이 사진을 찍고 이메일 주소를 적는다. 할머니는 단번에 우리 차에서 왕언니로 군림했다.^^

왕가의 계곡은 화려한 피라미드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고왕국 때와 달리 은밀한 계곡에 왕의 영원한 안식처를 만들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도굴과 파고에 시달리며 방치되어 60여기의 왕릉이 발굴이 되었지만 하지만 대부분이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이다.

1922년 왕가의 계곡에 기적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 발굴이 이뤄진 것이다. 유일하게 모든 유물들이 고스란히 발굴되어 현재 카이로 박물관 2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투탕카멘은 18세에 요절했기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부장품이 묻혔을 거라고 생각하면 도굴된 다른 왕릉은 어떤 유물들이 묻혔을까 생각해본다.

입장권(어른 70£E, 학생 35£E)를 내고 들어가면 세 곳의 왕릉을 관람할 수 있다.

각 무덤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대부분의 관람객이 8번 메렌프타, 16번 람세스 1세, 6번 람세스 9세 무덤을 관람한다.  

6번 람세스 9세 무덤에 먼저 들어갔다. 수천년 전에 죽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누구의 무덤에 들어간다는 것에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긴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천장에 벽화가 보인다. 다른 유적과 달리 부조와 벽화는 색깔을 담고 있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색깔이라..

인간이 지금처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어와 문자이다. 4만년 전 최후의 빙하기가 왔을 때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용량의 뇌를 가진 네안데르탈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후변화가 왔을 때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바로 언어이다. 서로 간의 정보교환을 통해서 사냥 동물의 이동 시기나 경로를 쉽게 예측 할 수 있었던 호모사피엔스와는 달리 네안데르탈인은 엄습하는 추위에 쓸쓸히 사라졌던 것이다.

언어의 부산물 중에 하나가 바로 문자이다. 나의 과거를 영원히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가 축척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정보교류를 하고 문자를 이용해서 정보를 축척하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왕릉의 그림을 보면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부조는 태양원반의 창조 신비, 우주생성의 비밀들, 빛을 탄생시키기 위한 창조적 힘들이 표현되고 있다고 한다.

투어는 여러 사람이 모인지라 시간이 꽤 걸렸다. 가이드에게 잠시 일행과 떨어져 구경하겠다고 하니 11시 30분까지 보고 오라고 말한다.

16번 람세스 1세 무덤으로 들어가니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오시리스에게 인도되는 왕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며 무덤 안쪽의 석관도 인상적이다.

4번 람세스 11세 무덤은 비교적 관람하는 사람이 적었다.

8번 메렌프타 무덤으로 들어가려고 발랄한 걸음으로 들어가니 검표원이 막는다. 무덤에 입장을 할 때마다 구멍 하나씩을 뚫었는데 입장표에 구멍이 3개가 뚫려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이다. 뭐야 3군데 밖에 못 봤던거야?

그래도 메렌프타는 꼭 보라고 하던데..

미소 작전을 쓰며 거의 우기다시피 들어가니 검표원도 어쩔 수 없이 보내준다. 역시 다른무덤과 달리 화려하고 아름답다. 세 태양의 탄생이라든가 별들과 태양들로 이루어진 반구 위에 솟아 있는 오시리스 상은 놀랍도록 세밀하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왕의 석관이다. 이곳에서 왕의 미이라가 영원한 안식을 누렸겠지?

관심 깊었던 62번 투탕카멘 무덤은 입장료(일반 80£E, 학생40£E)를 따로 받기 때문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왕가의 계곡을 관람하고 하트셉수트 여왕 장제전(입장료 어른 30£E, 학생 15£E)으로 이동했다. 하트셉수트투는 트모시스 2세의 첫 번째 왕비였는데 왕비가 죽자 후궁이 낳은 10살 아들의 섭정을 하다가 스스로 파라오가 된 여인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측천왕후와 비슷하기도 하기는 하지만 여왕이 죽고 다시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주차장에 내리자 저 멀리 장제전이 보이는데 주변 절벽과 어울려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장제전 테라스에서 가이드가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 준다. 가져온 책을 보면서 벽화를 보니 장난스럽게 책을 치며 자신의 설명에 집중하라고 한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프라이드가 강한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라스에는 오벨리스크에 쓰이는  장미 빛 화강암 거석을 채취하기 위해 아스완으로 떠나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거석들이 운반 되는 과정을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이런 거대한 거석들을 옮길 생각이나 했다니.

고생해서 옮겨 놓고 다시 수백킬로를 거슬러 올라가 또 다시 채취하고.. 정말 대단한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말리아 지역과 교역하는 과정이 그려진 벽화에는 홍해가 빨간색으로 칠해져있다. 홍해는 예전부터 그렇게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제전을 자세하게 둘러보고 싶지만 너무 덥다. 혹시 시원할까 기둥을 만져봤지만 기둥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장제전 관람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차에 올랐다. 그래 믿을 건 에어컨 밖에 없구나...

다음 코스는 람세스 3세의 신전인 메디네트 하부(입장료 어른 30£E, 학생 15£E)이다.

신전과, 왕궁 , 사제들의 거처, 신성호수, 나일강의 수위표, 작업장, 행정청, 선창, 창고, 도서관, 마구간, 우물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때 6만 명의 사람이 이곳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하나의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기둥과 벽이 인상적이었다.

신전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멤논의 대형 석상을 관람했다. 기원전 27년 지진 때문에 파괴가 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 웅장한 자태를 보는 이로 하여금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한다.

해 뜰 무렵 동상이 어떤 노래 소리 같은 기이한 소리를 냈다고 하지만 로마 황제 루시우스 셉티미우스가 199년 동상을 복원하러 손을 대는 바람에 노래가 멈췄다고 한다.

모든 관람을 마치고 룩소르 동안으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4시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가게를 찾았다. 더운 날씨 때문에 목이 무척 탔는데 1L 물을 한 번에 다 마셨다. 물론 유적지에도 음료를 팔기는 하지만 콜라 한 캔에 10£E, 아이스크림 하나에 20£E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룩소르 게스트하우스는 도미토리가 25£E이며 프리미엄 5$를 더 내면 빨래, 저녁 식사가 제공된다.

그동안 밀린 빨래는 한방에 해결했고, 오징어 볶음을 맛 볼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한국인 여행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만도우’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룩소르역에서 내리면 만도우라는 사나이가 와서 한국말로 말을 걸을 것이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숙소부터 택시, 자전거 대여, 기념품까지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에 많은 한국인이 만도우를 찾는다.

자기 몫을 적당하게 챙기기 때문에 의외로 많은 여행객들이 만도우를 이용한다. 역 근처에 만도우가 없을 때에는 낯선 청년들이 만도우 친구라며 다가 올 것이다. 물론 만도우에 대해 불만이 있는 여행자도 많으니 잘 비교해보며 만도우에게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밤에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인 김사장님과 여행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얻는 지식도 나에게는 소중한 재산이다.

저마다 할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들었다.


8월 3일(금)

밤늦게 잠들어서 그런지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이집트 최대 신전은 카르나크 신전으로 향했다. 기차역부근에서 카르나크로 가는 미니버스(25pt)가 있는데 가끔 있기 때문에 기차역에서 걸어서 룩소르 박물관 쪽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미니버스에 ‘카르나크’라고 외치면 카르나크 신전으로 가는 미니버스는 멈출 것이다.  

최대 신전답게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랐다. 입구에는 작은 스핑크스들이 도열해 있는데 스핑크스의 길이라고 불린다.

수많은 신전과 탑문을 관람하는데 일이 터졌다.

카메라를 자동 셔터로 해 놓고 유적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고 있는데 카메라가 바람에 떨어진 것이다.

이런..

카메라를 살펴보니 렌즈가 들어가지가 않는다. 렌즈 경통이 망가진 것이다.

아.. 이럴 때는 정말 여행하기 싫다.

마음을 잘 추슬러서 신전을 관람한 후 시내에서 환전을 하고 나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김사장님에게 물어보니 카메라 수리는 카이로에 가서 해야 하고 기간도 많이 걸린다고 말한다.

카메라를 새로 사려니 이집트에서는 카메라 값이 장난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도 기록에 남겨야 하는데..

카메라 때문에 여행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기약 없는 카메라 수리를 위해 카이로로 가기보다는 요르단 페트라로 향하는 길을 선택했다. 왜냐면 여행은 계속 되어야 하기에..

오후 5시에 출발하는 다합 행 버스를 타기 위해 같은 길을 가는 대학생 3명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버스터미널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데(20£E정도 나온다.) 한 미니버스가 서더니 5£E에 데려다준다고 한다.

어? 거리가 꽤 먼데.. 믿고 타보니 근방의 기차역 앞에서 선다.

여긴 기차역이잖아! 따져 물으니 기차역 옆의 UPPER EGYPT 사무실을 가리킨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표를 사고 터미널까지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합행 버스표 120£E를 끊고 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비 10£E을 냈다.

이제 버스 안에서 20시간을 버티기만 하면 되는구나.

룩소르를 떠난지 6시간 정도 지나니 홍해의 관광지 후루가다가 도착했다. 과자와 음료를 사려고 버스에서 잠시 내리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룩소르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장호와 한빛이다. 헤어진지 하루가 되었지만 같은 버스를 탔다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반겼다.

한빛은 비행기 일정이 맞지 않아 일행 5명과 떨어서 혼자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요르단 페트라로 간다고 하기에 앞으로 나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이제 사진은 한빛 사진기로 찍으면 되겠다.^^

버스에서의 장기 여행은 괴롭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몸도 적응을 한다. 곳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외국인은 체크하지 않고 현지인만 체크한다.

한 검문소는 현지인에게 모든 짐을 내려놓게 하고 꼼꼼하게 체크를 한다. 요즘에 테러가 많아서 그런가?

이집트 청년에게 ‘너 이렇게 체크 하는데 기분 나쁘지는 않아?’라고 물으니

‘기분이 안 좋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유창한 영어로 털어 놓는다.

새벽 무렵 시나이 반도에 들어서자 검문이 심해진다. 이제는 외국인의 여권을 검사할 정도이다.

시나이반도는 1967년 이스라엘과의 6일 전쟁이후 1982년까지 15년간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았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자 군사요충지이기도 하기에 이집트 정부는 같은 아랍국들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하며 이스라엘과 수교를 하면서 찾은 땅이기도 하다.

다행히 자리가 꽉 차지 않아 반쯤 누우면서 잠들 수 있었다. 어서 시간이 지나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