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여행기 2 다카 탐방 (다카 2010.1.25)

1월 25일(월)

숙소를 Old Dhaka 지역의 호텔로 잡은 것은 잘 못 선택했다. 새벽에 크랙션 소리가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토해내는 매연 때문에 목이 컬컬할 정도이다.

방글라데시는 관광산업이 아예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여행지에 대한 인프라도 희박하다. 며칠 안 남은 상태에서 둘러 볼 수 있는 곳은 사실상 다카 밖에 없으며 그마저도 Old Dhaka모여 있다.

오전 11시에 출발하니 도로에는 자전거 릭샤가 꽉 차 있다시피 하다. 릭샤와 차와 오토바이가 어우러져 혼잡스러운 모습니다.

사다르 가트(Sadar ghat)는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골목이 미로 같다보니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사다르 가트에 도착하자마자 절로 탄성이 나온다. 강은 움직이는 배들로 가득차 있고 강 너머 조선소에서의 망치 소리가 여기저기서 서라운드로 울리는 형태이다. 마치 협주곡을 연주 하는 웅장함이 느껴진다. 강 건너편에서 야채를 실은 배들이 많으며 강변에는 야채, 과일상이 쭉 늘어서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인도와는 달리 서로 사진 찍어달라고 한다. 한 청년은 사진을 한 컷 찍어주니 지고 있던 토마토 하나를 손에 쥐어 준다. 사다르 가트에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엿 볼 수 있다. 온갖 종류의 가게에서는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이 보이고, 여기저기서 뛰노는 아이, 한쪽에는 옷을 입은 채 목욕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다.

사다르 가트에서 가까운 아산 만질(Ahsan Manzil)은 인도 이슬람 귀족인 나와브(Nawab)의 풍족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핑크 궁전으로 알려진 나와브의 대저택을 박물관 건물로 사용하는데 총 31개 방이 있으며 1872년 보수하여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23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전시실에는 나와브가 사용했던 가구, 가정용품 도구, 도자기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초상화와 램프, 종이 인상적이다.

산카리아 바자르(Shankharia Bazar)는 힌두 거리고 알려져 있는데 길이 복잡해 찾기가 힘들었다. 거리는 상점들로 늘어서 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꽉 찼다. 도대체 이곳이 어디지?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니 이 지역이 산카리아 바자르라고 한다. 거리를 헤메다 긴 담장이 보인다. Central Jail 우리말로 해석하면 중앙 교도소이다. 도심 한 가운데 교도소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레스토랑에서 밥에 양고기를 곁들여 야채 반찬과 짜이를 시켜 먹으니 105Dh(1800원 정도)가 나온다. 먹은 것 치고는 나름 착한 가격이다. 이곳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거나 웃돈을 요구 하지 않는다. 관광객이 붐비는 인도와 대비된다.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릭샤(20Dh)를 타고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국립박물관 다카 시내 중심부인 샤흐바흐(Shahbagh)에 위치해 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의 진귀한 유물들과 방글라데시의 역사, 문화 유산 등이 전시되고 있다. 4층 건물에 43개 갤러리가 있다. 방글라데시 지도, 암석, 광물, 나무, 꽃, 과일, 파충류, 동물, 조류, 포유동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방글라데시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보트, 부족들의 도예, 공예품, 건축, 조각 장식, 무기, 유리공예, 인형, 악기 아라비아 페르시아 서한 등이 있다.

2층의 지질, 생물을 비롯해 옛 생활상을 밀랍인형으로 전시가 되어 있으며 10세기 부처상과 힌두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방치되어 있다시피 하다. 기원전에 유통 되었던 동전과 3m 80 나무로 된 Pillar 볼만했다.

3층 갤러리에는 1943년 Famin가 그 당시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 했는데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확 와 닿는다. 또한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서 독립하는 과정을 상세하고 볼 수 있다.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을 할 때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으로 지금의 파키스탄과 한 나라였다. 같은 종교를 가졌지만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발취한 방글라데시 역사-

1. 독립이전의 역사 방글라데시 역사는 1341년 델리에서 독립한 뱅갈 지역과 관련이 있다. 모슬림 지도자들이 장시간 통치한 후 1576년 무갈 제국의 제왕인 악발에 의해 정복되었다. 18세기 초 이 지역 통치자는 실질적인 주권을 상실하였고 영국서인도회사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은 1775년 이후 서뱅갈, 오리싸, 자카한드, 비할 등 광대한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뱅갈은 1905년 영국에 의해 서뱅갈과 동뱅갈로 나누어졌다. 동뱅갈은 현재 방글라데시 지역과 거의 일치된다. 새로운 지역은 대부분 모슬렘교도가 살기 때문에 이러한 분할은 모슬렘 신도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이들은 이러한 분할을 모슬림과 힌두교의 분리 시도로 간주했다. 이러한 분할은 1911년 취소되었지만, 결국에는 영국령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질 때 그 지침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두 개의 ‘날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인도 서쪽, 다른 하나는 인도 동쪽이다. 동쪽 지역은 뱅갈의 동쪽 영토와 이전에 아쌈의 실헷지역으로서 1955년까지는 동 뱅갈, 그리고 그 이후에는 동파키스탄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의 두 지역은 자연환경, 경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전혀 다르고 거리상으로도 거의 1천 미터(1,620km) 이상 떨어져 있다. 전체 파키스탄 인구의 56%인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서파키스탄의 통치를 받는 것에 많은 불평을 하게 되었다. 정부투자와 개발기금의 불균형은 각 지역에서 불만을 더 고취시켰다. 수년간에 걸쳐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개혁을 위한 시도들이 무위에 돌아가면서 심각한 폭동들이 1968년과 1969년 사이에 일어났다.

2. 독립 후 현재까지

자치획득운동은 1970년 12월 세이크 무지불 라만(일반적으로 세이크 무집으로 불림)의 영도 하에 아와미 연맹이 실제적으로 동파키스탄의 전 국회의석을 차지하여 파키스탄 국회의 다수당이 되었을 때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의 정치적 대결을 피하려고 한 무하마드 아가 야화 칸 대통령은 두 번씩이나 국회 개회를 연기시켰다. 자치의 요구를 묵살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동파키스탄에서 거친 시위와 납세거부운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그 결과로 1971년 3월 25일 시민전쟁이 일어났다. 바로 그 다음날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들은 방글라데시 독립을 선포하였다. 수개월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잠정적으로 일백만 명의 뱅갈인들이 동파키스탄에 의해 살해되었고, 1천만 명이 인도로 피난을 갔다. 이러한 전투는 다카, 치타고나, 콤밀라, 실헷, 제소레, 바리살, 랑풀, 쿨나 등 전국으로 번졌다. 결국 인도가 방글라데시와 제휴하여 12월 6일 방글라데시 정부를 인준하게 되었다. 12월 3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두 주간의 전쟁 이후에 동파키스탄에 주둔한 파키스탄 군대는 패퇴하게 되었다. 서파키스탄의 감옥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세이크 무집은 석방되었고, 1972년 1월 정부를 세워서 수상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아부 세이드 초우드허리가 대통령이 되었다.

세이크 무집 수상은 재통일하자는 파키스탄의 요청을 거부하고 전쟁에 의해 황폐된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으로 되었고,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 정부를 인준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와 인도는 분쟁의 와중에 체포된 파키스탄 전쟁포로 9만 명을 본국으로 송환하기를 거부했다. “자유의 전사”라고 불리는 무장 방갈인들은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비하리 시민들과 전투를 벌였는데, 특히 1972년 3월 인도 군대가 철수한 이후 이 싸움은 격렬했다.

야화 칸 정부가 몰락된 후 정권을 잡은 파키스탄의 줄피칼 알리 부토 대통령과 인도의 인디라 간디수상이 평화적으로 각 나라 간의 평화정착을 이룩한 1972년 7월 이후 이러한 분쟁은 종식되었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으로 1974년 2월 방글라데시 정부를 인준하였다. 그 결과로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는 파키스탄 전쟁포로를 석방하고 인질을 교환하기로 합의하였다.

방글라데시는 점차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인준을 받게 되었다. 1972년에는 영연방에 가입하게 되었고, 1974년에는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되었다. 1972년 나라의 주요한 산업, 은행, 선박회사, 보험회사 등이 모두 국유화되었다. 방글라데시 건국의 공로자라는 대중의 폭발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무집정권은 높은 인플레,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75년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무집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암살되었다. 그 해 두 번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후 지아 울 라만 장군이 통치자가 되었고, 1990년대까지 이어진 군사정권통치가 시작되었다.

1981년 지아 대통령은 쿠데타 시도에서 암살되었다. 이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그의 후계자는 1982년 무혈 쿠데타로 대통령직을 이은 후세인 모하메드 에르샤드가 되었다. 그는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그의 군대 직함을 사직하고 공평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해서 이겼다. 그러나 그는 후에 부정부패 혐의로 1990년 12월 사임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해 2000년 감옥에 갇히게 된다.

1991년 2월 실시된 선거에서 방글라데시 국민당(BNP)이 정권을 잡았고, 지아 울 라만 대통령의 미망인인 칼레다 지아가 수상이 되었다. 1994녀 거의 모든 야당 국회의원들이 지아 정권을 부패협의로 탄핵을 하면서 자신들의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야당에 의해 여러 차례의 과격한 시위가 있은 후 의회는 1995년 11월 해산되었다. 주요 야당은 또한 1996년 2월에 실시된 선거를 보이콧하였다. 지아는 다시 권력을 잡았으나 야당은 계속해서 저항을 하였다. 그녀는 결국 사임하였고, 하비불 라만이 인도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1996년 6월 새롭게 선거가 실시되었고, 야당인 아와미 연맹이 승리하였다. 이 연맹은 방글라데시 초대수상의 딸인 하시나 와즈드가 대표이다. 와즈드 수상은 현안인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1998년 이후 야당의 계속적인 시위로 인해 전국이 또다시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었다. 2001년 6월 라티훌 라만이 대행체제가 출범하였고 이해 10월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지명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지아와 국민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하였고, 그녀는 다시 수상에 취임하게 되었다.

전시실에는 격동의 역사를 담아 놓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독립 전쟁 당시 파키스탄 군인의 만행에 대한 사진이 많았다. 같은 종교지만 꽤 사람 많은 사람을 학살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전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전쟁박물관(Liberation War)에서 알 수 있었다. 국립박물관에서 30다까 주고 독립전쟁박물관을 가는데 골목 안에 있어 찾기가 힘들었다. 이곳은 독립전쟁에서 순직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1996년에 설립했다. 2층 건물에 6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전쟁 당시의 희귀한 사진과 문서 등이 주를 이루며 자유를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사용했던 물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1948년 동파키스탄 시절 서파키스탄 정부는 언어를 자신들이 쓰는 우르두, 영어로 언어를 바꿀 것을 강요했던 것이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독립운동은 학생들의 운동으로 시작된다.

박물관 내부는 으스스한 분위기이고, 특히 다카 근교 킬링필드에서 수집 된 5392개 해골중 70개가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는데 승리의 그 날을 항상 기억하자라는 문구가 써 있다.

호텔로 돌아와 숙박비를 내니 돈이 거의 없다. 은행은 많은데 ATM이 보이지 않아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살기가 있다. 이럴 때는 일찌감치 잠드는 것이 최선이다. 열이 더 나면 공항에서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건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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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바라 본 Old Dhaka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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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자전거로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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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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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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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남쪽의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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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같은 골목을 줄서서 지나는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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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무너져 가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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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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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비롯한 향신료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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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르 가트(Sadar ghat) 근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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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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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어달라고 조르는 현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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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편에서 야채를 싣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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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물건을 태우는 뱃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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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편에는 화물선이 정박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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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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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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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옷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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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에서 곧 열리는 남아시아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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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을 즐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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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삶이지만 웃음기 가득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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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로 옷을 수선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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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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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분홍색 목적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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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만질(Ahsan Manzil)은 인도 이슬람 귀족인 나와브(Nawab)의 풍족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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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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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카리아 바자르(Shankharia Baz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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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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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시간이 되자 저수지에서 목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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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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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다란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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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 없는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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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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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al Jail 우리말로 해석하면 중앙 교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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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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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로 가득한 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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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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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로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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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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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주변의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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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방글라데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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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기념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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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전거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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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박물관(Liberatio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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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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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으로 가득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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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찾는데 도움이 된 옥수수 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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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에 있는 동안 묵었던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