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일)

 

 호스텔 난방이 잘 안되어서 밤새 춥게 자는 바람에 감기에 걸렸다. 웬만하면 안 걸리는 감기인데 여행 막판 무리한 일정이 겹쳐서 몸이 약해졌나보다.

 

 오전 11시 30분에 스코페로 가는 버스 편을 타야 하기 때문에 프리슈티나를 탐방할 시간은 오전 밖에 없다. 일어나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시내 탐방을 나섰다.(오전 8시 10분)

 

 코소보는 1998년 코소보 사태 이후 1999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하긴 했지만 코소보를 승인 한 나라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과 우리나라가 포함이 되어 있지만 아직 많은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다. 때문에 국가는 아직 미숙아 수준? 통화도 자체 통화가 아닌 유로화를 쓰고 있다.

 

 두산 백과와 위키 백과를 참고하면 코소보는 역사적으로 제1차 불가리아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의 영토였다. 1389년부터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립한 코소보는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항전한 성지로 여겨졌다. 소수의 세르비아인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을 문화 탄압, 일자리 박탈, 인종정화라는 이름의 학살로 탄압했으며, 나토의 개입으로 결국 국제 연합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 되었다.

 

 1999년 3월22일 미국의 리처드 홀브룩 특사가 밀로셰비치에게 평화안 서명 거부 시 나토 공습 최후통첩을 했으나 중재에 실패했고, 3월 24일 나토(NATO)의 유고 공습이 개시됐다.

 

 이후 5월 유엔 전범재판소는 밀로셰비치를 전범으로 기소했고, 6월 세르비아 의회와 밀로셰비치가 평화안을 수용함으로써 코소보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코소보 사태는 20세기 유럽 최악의 분쟁으로 기록됐다. 무장 독립투쟁을 벌여왔던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 수만 명이 1998년 악명 높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인종청소’ 명령으로 목숨을 잃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개입으로 베오그라드를 공습하면서 다소 한숨을 돌렸지만 코소보의 홀로서기를 거부한 세르비아 때문에 크고 작은 유혈사태를 치렀다. 이때 미국의 스텔스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코소보 시내에는 그렇게 볼거리는 없다. 아직 건설이 덜 되었거나 파괴 된 건물들이 보이며 새로 짓는 건물 중에서는 다소 색다른 디자인으로 지은 건물들이 있다.

 

 코소보 박물관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일요일은 11시에 열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 1982년 크로아티아인이 디자인 한 특이한 국립도서관과 코소보 독립을 도운 나라를 위한 기념탑과 그 나라들의 국기를 사람의 형상으로 한 조각상이 볼 만했다. 돌아오는 길에 버려진 교회가 있는데 무슬림 국가인 코소보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1시간 반 정도를 시내 탐방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이라야 빵과 우유와 시리얼을 주면서 알아서 먹는 수준.

 

 오전 10시 30분 터미널에 도착해서 스코페로 가는 버스편(5.5유로) 표를 구하고 카페에서 출발 시간까지 커피 한잔을 하면서 기다렸다.

 

 버스는 11시 30분에 출발 했는데 승객이 거의 없다. 평지를 지나 산악 지역을 올라가더니 고개 정상 부근에 국경이 있다. 도착 시간은 12시 40분. 오후 1시 10분에 마케도니아로 들어왔다.

 

 스코페에 도착하고 터미널 앞에 있는 산티 호스텔(Santi)에 여장을 푸는데 2층 침대의 2층을 배정하기에 1층은 없는지 물어보니 도미토리가 꽉 찼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도미토리가 꽉 찬 건 처음 있는 일. 대신 방이 매우 따뜻하다.

 

 곧장 불가리아 소피아로 갈까 고민하다가 스코페에 하루 머문 것은 이곳 시내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숙소 앞 대형마트에서 환전을 하고 시내 탐방을 나섰다.

 

 스코페는 도시 전체가 공사 중인데 짓는 건물마다 웅장하게 짓고 있다. 또한 도시 곳곳에 동상이 서 있는데 시내 중심의 알렉산더 동상이 가장 크고 웅장하게 서 있다.

이 동상은 그리스와의 외교 분쟁을 불러 온 동상이다.

 

 2011년 중앙일보 기사를 인용하면

 

 발칸반도 남부의 신생 국가 마케도니아의 수도에 세워지는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년) 동상 때문에 이 나라와 그리스의 해묵은 역사 분쟁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폐의 중심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광장에 14일(현지시간)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상의 일부분이 처음 등장했다. 부분별로 제작된 동상 중 상체 부분이 광장으로 운송된 것이다. 수일 안에 동상이 조립돼 돌받침대 위에 세워질 예정이다. 약 80억원이 투입돼 만들어진 이 동상의 길이는 받침 부분을 포함해 총 22m로 설계됐다. 이웃 나라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조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며 이 동상의 건립에 반대해 왔다. 두 나라의 감정 싸움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가 현재 그리스 북부 지역과 마케도니아로 분할돼 있는 것에 기인한다.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국가 ‘마케도니아’의 중심 민족인 슬라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역사는 자신들의 역사라고 여긴다. 반면 마케도니아는 자신들이 옛 왕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국가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1991년 유고연방 해체로 독립하며 국가 명칭을 ‘마케도니아’로 정하자 그리스의 특정 지역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 나라는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이라는 잠정적 국호로 유엔에 가입했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여기서도 역사분쟁이 있다는 것과 알렉산더 원조 논쟁이 있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알렉산더 동상 근처에는 프랑스의 개선문을 그대로 따 온 개선문이 있다. 이건 프랑스와 분쟁이 없나? 이러다간 표절 국가로 낙인 찍힐수도 있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스코페 출신인 마더 테레사 박물관에 가니 오후 3시에 문을 닫았다. 이곳의 박물관은 거의 오후 3시에 문을 닫는다. 북쪽의 요새에서 시내를 바라보려고 가니 요새는 탐방객에게 개방 자체가 되어 있지 않다.

 

 뭐 여는 곳이 없으니 짧은 시내 구경은 끝~ 대형 마트에서 들려 저녁 거리를 샀다. 마트에는 라면을 볼 수 있었는데 신라면과 MR PARK 라면이 있다. MR PARK? 처음 듣는 라면인데 호기심에 몇 개 구입해 숙소에서 해 먹었는데 김치 맛인데도 불구하고 김치 하나 없이 딸랑 스프하나에 냄새가 좀 역하다. 오죽하면 호스텔 스텝이 냄새가 난다며 양해를 구하고 부엌문을 닫았을까..

 

 내일이면 이번 여행의 종착지 소피아로 향한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설레이면서 서운한 감정? 그래도 부쩍 삼겹살이 먹고 싶다. 터키 여행 이후 쌀이라고는 구경도 못했으니 한국음식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