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화)


 아침 8시 주인이 ‘Park! 오늘 라이베리아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어서 서둘러야해’라고 말하며 깨운다.


 텐트에서 참 편안하고 깊게 잠을 잤다. 얼마 전 KBS ‘강연 100도씨’에서 캠핑을 하면서 딸의 아토피를 고쳤다는 사연을 본 적이 있는데 정글 속에서의 캠프로 모처럼 만에 에너지가 충만 되었다.


 Tiwai섬에서 하루 정도를 더 머물고 싶지만 라이베리아 비자가 확실치 않다. 라이베리아 비자는 한국인은 무비자이지만 확실히 비자 없이 국경을 건넜다는 최근의 정보가 없기 때문에 국경을 넘지 못하는 가능성도 봐야 한다. 31일에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에서 벨기에 브뤼셀행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만약 오늘 건너지 못하면 내일 프리타운으로 가고 거기서 돌아가 항공편으로 몬로비아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국경을 건너야 한다.


 결론적으로는 내 뒤로 여행 하실 분은 별 걱정 안 해도 된다.^^


 주인장에서 캠프 비용 (56,000Le +숙박비 20$)를 지불하고 오전 9시에 처음 섬으로 왔던 캄바마(Kambama)로 배를 타고 건넜다. 배를 타면서 아름다운 Moa 강의 전경을 감상 할 수 있다.


 라이베리아로 넘어 가려면 캄바마에서 지미(Zimmi)를 거쳐 젠데마(Gendema)까지 가야 한다. 지미까지는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 오토바이를 타려고 하는데 70,000Le를 부른다. 어제 비슷한 거리를 45,000Le에 왔다고 하니 중간에 페리를 타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더 든다고 하다. 일리있는 말이라 60,000Le에가 지미까지 가기로 했다.


 오토바이는 정글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모험을 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4륜 차량으로 정글을 달리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지금 꼭 그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단지 교통수단이 오토바이라는 것. 오토바이는 속도가 빨라 자동차들을 앞지른다.


 중간에 페리선착장에 도착해 배가 움직일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선착장에는 식사나 과일을 팔고 있는데 야자열매 하나에 얼마인지 물어보니 1,000Le이다. 여기까지 와서 3,000Le짜리 탄산음료를 먹을 이유는 없지. 야자열매 두 개를 사서 갈증을 해결하였다.


 큰 차량이 오고서야 페리가 움직이는데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줄을 끌어 당기면서 움직이는 배다. 속초의 명물인 갯배와 똑같은 원리이다.


 오전 11시 50분에 지미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젠데마까지는 48Km 정도 된다. 이곳에서도 오토바이(40,000Le)로 이동. 단 나 말고 한명을 더 태운다고 한다.


 지미에는 이미그레이션이 있는데 이곳에서 외국인은 신고를 해야 한다. 여권을 보던 이민국 직원은 라이베리아 비자가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 한국인은 무비자라고 하니까 고개를 흔단다. ‘국경 가서 내가 알아서 할게.’ 쓸데없는 참견이 귀찮았다.


 그런데 이름이 Park인걸 보고는 박지성을 아냐며 친근한 표정으로 전환된다. 이번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박지성 덕을 많이 보았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뛰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사내들은 박지성을 알고 있으며 내 이름이 같은 걸보고는 친근감을 표시한다. 덕분에 검문소나 국경을 수월하게 통과를 했다. 다음 아프리카 여행 때는 박주영이 좀 잘하면 덕을 볼라나?


 오토바이는 국경으로 출발했다. 어제부터 워낙 많은 시간을 오토바이를 타 엉덩이와 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늦춰서는 안 되지.. 계속해서 달렸다.


 국경에 도착할 때쯤 동양인이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장기 여행자임을 알 수 있다. 오토바이 운전사에게 잠시 쉬자고 하고 동양인에게 다가갔다.


 자전거의 주인은 일본인으로 이름은 마기이다. 마기도 모처럼의 동양인이 반가운지 웃으면서 맞아준다. 마기는 자전거로 전 세계를 5년째 여행하고 있으며 아프리카는 모로코부터 쭉 시작했다고 한다.대단한 여행가이다. 3년 전에 아시아에서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로 세계일주를 하는 한국 여행자를 만났다고 한다. 혹시 여행기를 보는 이 중에 있을려나..


 서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폴과 마기 여행고수 2명을 만났다. 앞으로 더 분발(?)해야 겠군..


 마기와 연락처를 교환하고 계속 달리기 시작해 오후 2시 30분에 젠데마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남은 40000Le를 720라이베리아 달러(L$)로 교환했다.


 시에라리온 이미그레이션 직원은 20$를 뇌물로 요구한다. 버티고 있을 수도 있지만 라이베리아 비자 관계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트집 잡힐 수도 있다. 그에게 지갑에 있는 700L$를 보여주면서 돈이 이게 전부라고 했고, 이 돈으로 몬로비아까지 간다고 했다.


 직원은 300L$이면 된다고 했지만 목마르기 때문에 100L$ 더 달라고 했다. 참.. 뇌물가지고 흥정을 하다니. 결국 700L$ 중에 300L$만 줬다. 시에라리온의 마지막은 지저분한 인상으로 끝났다.

국경 다리를 건너니 라이베리아 Bo가 나온다. 경찰에게 여권을 건네주면서 한국인은 무비자라고 하니, 경찰은 전화를 하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비자임을 확인해 준다. 아무런 제지 없이 입국했다.


 한국인은 서방국가 중에서 라이베리아에 무비자로 입국 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1982년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서 사증면제협정이 맺어졌다. 30년 전에 맺어진 협정이고 그 동안 정치 상황이 많이 변했지만 워낙 교류가 없는 나라이기에 무관심 속에서 사증 면제 협정은 계속 유지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꿀맛 같은 협정이다. 나에게는 여행에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남긴 유일한 업적일 수도 있겠다. 라이베리아에서도 황열병 예방접종 카드(일명 옐로카드)를 검사를 한다.


 국경에서 몬로비아로 가는 차편은 운전사들이 500L$를 부른다. 300L$인걸 알고 있는데.. 일단 음료수 한잔을 하면서 옆에 있는 사내에게 몬로비아까지 가는지 물어보았다.


 사내는 말리 사람으로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한국인은 자신의 형제나 마찬가지라면서 함께 차를 타고 가자고 한다. 이게 웬 횡재야? 차량을 타려고 하니 현지 운전사들이 왜 자신들의 손님을 가로 채 가냐며 항의를 한다. 별로 그쪽 차들은 탈 생각 없었거든!


 말리 사업가와 현지인 2명과 함께 차량을 탔는데 몬로비아로 가는 도중에 체크포인트에서 제지를 많이 당한다. 경찰들은 내 여권을 보면 ‘Welcome To Liberia!'라고 하면서도 말리 사업가와 현지인 여권은 계속 문제를 삼는다. 아마 뇌물을 요구 하는 듯 여권을 꼼꼼히 보며 시비를 건다.


 몬로비아에는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말리 사업가는 자신들의 숙소로 가거나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구글맵을 체크하니 걸어서도 충분히 갈만한 거리이다. 다소 위험한 분위기라서 꾸물거리면 해꼬지 당활 확률이 크다. 최대한 빨리 걸어갔다.


 결국 40분을 걸어 시내 중심에 도착해 Randall Street의 St Theresa's Convent로 갔다. 그런데 이곳에 방이 없다고 한다. 밤이 늦어서 막막한 상황이다. 경비에게 산 호텔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니 청년 두 명에게 나를 인도해 준다. 청년들과 함께 호텔을 찾았지만 낮에는 호텔에 머물 수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방이 꽉 찼거나 하루 숙박비가 75$를 하는 곳 등등 싼 숙소를 찾기 힘들었다.


 한 시간 정도를 청년들과 싼 숙소를 찾았다. 아무래도 비싼 호텔이라도 잡는 것이 좋겠다는 판들이 들 때쯤 청년들은 이리저리 상의하더니 택시를 타고 Motel로 안내해준다. 이곳의 시설은 열악하고 음악으로 시끄럽지만 그래도 35$에 머물 수 있었다.


 Motel에서 여장을 풀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바의 DJ는 오늘은 화요일이라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주말에는 바가 꽉 찬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도 어서 돌아가고 싶어 ㅜㅜ.


 오늘 먼 거리를 이동해서 그런지 피곤이 엄습했다. 그래도 마지막 국가인 라이베리아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1월 29일(수)


 라이베리리아는 15세기를 전후하여 유럽인에게 알려졌으며 후추해안 또는 곡물해안이라 불렸다. 그렇지만 노예무역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 이루어지면서 1821년 미국식민협회가 해방노예의 건국을 위하여 몬로비아에 해방 노예를 이주시키고 ‘라이베리아(자유의 나라)’라고 명명하였다.


 1847년에 버지니아 출신의 혼혈인 J.로버츠가 미국을 모방한 헌법·국기를 제정하여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선언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독립한 라이베리아는 미국에서 이주하여 온 소수의 해방노예들은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에게 지배층 역할을 했다. 독립국 라이베리아를 가장 먼저 승인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었기 때문에 재정적 위기에 처한 라이베리아 정부는 1871년 이래 영국의 원조를 받아왔다.


 라이베리아가 재정적 안정을 이룩한 것은 1925년에 고무나무 재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30년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억압정책과 노예제도 존속 등의 문제가 표면화되자 라이베리아는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국측에 대한 유일한 천연고무 보급지 및 미국의 군사기지가 되었고, 1944년에는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독일·일본에 선전포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자본이 지하자원 등 라이베리아의 자원개발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1947년 이래 미국정부의 원조에 의해 경제개발이 추진되었다.


 미국에서 건너 온 흑인의 정당인 트루휘그당은 1847년 이래 계속 정권을 담당해왔으며, 1955년에는 다른 정당을 불법화하고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 총인구의 3%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이들의 독재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쌓이던 중 1980년 장군 S.K.도에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대통령 톨버트 및 각료들이 처형되었고, 장기집권해온 트루휘그당과 의회는 해산되어 인민구제평의회에 의한 군사혁명정부의 통치가 실시되었다.


 도에는 1986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도에 정권 아래에서도 부패, 경제악화, 부족 대립 등이 계속되었으며 1989년 12월에 반란군의 무장 봉기로 내전이 시작되었고 1990년 9월 C.테일러 반군에 의해 도에가 피살당한 후 내전이 확대되었다.


 1993년 7월 교전세력간 평화협정 서명으로 국가평의회 및 과도의회를 구성하였으며 7년간의 내란 이후 1997년 7월에 대통령·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어 8월에 찰스 G.테일러(Charles G.Taylor)를 행정 수반으로 하는 신정부가 출범하였으나 내전의 영향으로 경제가 파괴되고 공권력이 확립되어 있지 않는 상태이다.


 라이베리아에는 영웅이 있는데 조지 웨아이다. 라이베리아의 정치인이며 전직 축구 선수이다. 1995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까지 유럽과 남미 국적이 아닌 유일한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또한 웨아는 FIFA 올해의 선수 가운데 모국팀이 FIFA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다.


 카메룬 프로리그에서 뛰던 조지 웨아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1988년, 현 아스널의 감독인 아르센 웽거 감독을 만나 유럽 무대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1990년대 프랑스 르샹피오나의 최고 명문 구단인 AS 모나코와 그가 전성기를 보낸 파리 생제르맹에서 맹활약 했고, 이를 발판으로 1995년 세리에 A의 명문인 AC 밀란으로 이적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있어 황금기를 맞이하였고, 1988년 카메룬 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르샹피오나 우승 1회, 쿠프 드 프랑스 우승 3회, 세리에 A 우승 2회, 잉글랜드 FA컵 우승 1회 등을 차지하며 '우승 제조기'라는 별명까지 붙으며 축구 선수로서 모든 것을 이루었다.

또 조지 웨아는 지난 100년 동안 대륙별 최고의 축구스타를 뽑는 투표에서도 남아메리카의 펠레, 유럽의 요한 크라위프, 북아메리카의 우고 산체스, 아시아의 차범근과 함께 20세기의 아프리카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FIFA 월드컵의 지역 예선전에서도 맹활약을 하며 자국 국가대표팀의 선전을 이끌었지만 나이지리아에 밀려 탈락하면서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축구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 라이베리아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엘렌 존슨-설리프에 패하여 당선되지는 못했다.


 모텔은 일반적인 숙소라기 보다는 러브 모텔 기능을 하고 있다. 슬럼가 분위기가 나서 외국인인 내가 머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체크 아웃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시내를 나서기 전 오늘의 목표를 세가지로 두었다. 첫 번째는 브뤼셀 에어라인 오피스를 방문해서 항공편을 오늘로 옮기고 여의치 않을 경우 공항까지 가는 정보를 알아내는 것. 두 번째는 St Theresa's Convent에 숙소를 옮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세 번째 목표는 다른 숙소로 옮기는 것이다.


 첫 번째 목표를 향해 브뤼셀 에어라인 오피스로 향했다. 몬로비아 시내는 브로드웨이가 중심가를 이루고 있다. 뮤지컬로 유명한 미국의 브로드웨이와는 당연히 다른 분위기.


 브로드웨이에서 브뤼셀 에어라인 오피스를 방문했더니 항공편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첫 번째 목표는 포기하고 그럼 공항으로 가는 정보를 물어보았다.


 몬로비아의 국제공항인 Robers 국제공항은 시내에서도 60Km 떨어져 있는데 론니에는 70$를 주고 택시를 타고 가라고 무책임하게 써있다. 분명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교통편이 있을 것이다. 에어라인 직원은 처음에는 개인택시를 이용하라고 하더니 이내 현지인들의 교통편 정보를 준다. 브로드웨이와 Randall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쉐어 택시를 타고 ELWA Junction로 가서 그곳에서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타면 총 3$(3,300원)가 넘지 않을 거라고 한다. 이런 고급정보를.. 직원은 영어를 쓰긴 하지만 잘 통하지 않는다. 답답한지 쪽지에 영문으로 적어서 건네준다. 이 정보 하나로 67$ 이상을 아끼게 되었다.^^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는 영어를 쓰긴 하지만 현지어와 섞여 어딘가 다른 영어이다. 대충 단어는 들리는데 영어 발음이 어눌해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도 다른 국가의 프랑스어보다는 나은 편이다.

어제 방이 없었던 St Theresa's Convent에 가서 오늘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직원은 오후 2시쯤에 다시 와보라고 한다. 일단 예약을 해 두었다.


 다음은 몬로비아 시내 탐방이다. 몬로비아의 볼거리는 비교적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에 걸어서도 탐방이 가능하다. 가장 먼저 간 곳은 국립박물관이다. 입장료를 5$를 내고 박물관 주변의 노점에서 먹거리를 사서 박물관 의자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하려는데 낮익은 얼굴이 보인다.


 ‘폴~’, ‘어이 Park’


 폴과 다섯 번째 만남이다. 감비아의 시에라리온대사관에서 만난이래 기니비사우, 기니, 시에라리온에서 만났다. 신기한 것은 따로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데 만나게 된다는 것. 참 이런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


 폴도 어제 숙소를 구하지 못해 20$짜리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고 한다. 시설은 열악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지낼만 하다고 한다. 아하 이런 고급정보.


 나 역시 공항으로 가는 정보를 폴에게 주었다. 폴은 비싼 택시를 이용 할 뻔했다며 고급정보라고 하며 무척 기뻐한다. 72살이면 나름 개인택시를 이용해도 될 텐데.


 폴과 잠깐 이야기 한 후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유물과 사진이 있는데 5$를 내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소박한 박물관이다. 그나마 관광객들이 방문할만한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시내에서 해안에는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에는 Hotel Ducor가 있다. 1970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불린 곳이다. 높은 곳에 있음으로 시내를 볼 수 있겠다 싶어 봉우리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라이베리아의 국부인 로버트의 동상이 있고 뒤편으로 Hotel Ducor가 보이는데 건물이 파괴되고 앙상한 몰골만 남았다. 현지 청년에게 물어보니 1999년에서 2003년 내전이 발발했을 때 파괴되어 복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의 사진 속에는 아름다운 호텔이었는데.. 전쟁의 상흔이 상징처럼 남아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경찰이 제지를 한다. 경치를 보기만 할 거라고 하니 사진을 찍지 말라면서 주의를 준다.


 호텔에서 해안과 몬로비아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대서양과 강을 중심으로 집들이 있으며 주변은 초지로 형성되어 있다. 이 풍경을 놓칠 수는 없지. 휴대폰 사진으로 살짝 찍었다.


 나오는 길에 경찰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을 수 없는지 물으니 그럼 돈을 달라고 한다. 뭐 이미 찍었는데..


 전쟁으로 파괴되었지만 몬로비아의 상징이니만큼 흉물로 방치해두기 보다 어서 복구를 해서 새로운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한다.


 해안으로 내려오니 오전 11시 30분. St Theresa's Convent로 가서 오후 2시에는 숙소를 잡을 수 있는지 물으니 직원은 그렇다고 하는데 옆의 직원이 제지하더니 오늘은 힘들고 내일 8시에 오면 반드시 방을 줄 거라고 말한다. 세 번이나 방문했는데 오늘도 안 되겠군. 할 수 없이 내일 8시에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대신 폴이 알려준 숙소로 갔다. Rose Jam Motel로 Water st와 Ashmun st 중간거리에 있다. 하루에 20$인데 시설은 뭐.. 열악하다. 특히 전기는 저녁에 딱 3시간만 가동을 하고 모기장이 없어서 고생을 했다.


 은행에서 여행경비를 인출하는데 US$가 인출이 된다. 라이베리아 달러(L$)는 최고액이 100L$인데 우리 돈으로 1300원 정도로 사람들이 쓰기에는 소액이다. 때문에 큰 단위의 US$를 사용하고 있으며 잔돈은 L$로 병행해서 쓰고 있다. US$가 인출되더라도 거리에는 수많은 환전상들이 있다. 20$를 환전하니 1600L$를 준다. 대략 1$에 80L$로 보면 된다.


 약간 퇴폐적인 모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겼다. 모텔 직원은 3일을 머물 줄 알았는데 하루 만에 나가니 의아해 하는 표정이다. 어제 이야기를 나눴던 DJ에게 명함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숙소에서 폴과 다시 만났는데 양주를 건네면서 한잔하자고 한다. 폴은 내일 가나의 아크라로 가기 때문에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다. 아크라에서 여행을 마친다고 한다. 폴에게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 건지 물어보니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을 거쳐서 가봉으로 간 후 앙골라로 여행할거야. 두 콩고는 위험해서 이번에는 안 가. 물론 수도 위주로 갈 거야. 껄껄~’


 대단한 노인이다. 폴은 개인 여행사이트(www.wedrowkizpawlem.pl)를 운영하고 있음으로 이 글을 읽는 이들은 한번쯤 방문해 보길. 폴란드어지만 쉽게 클릭해서 사진을 볼 수 있다. 방명록에는 ‘Park의 여행기를 보고 방문했어요.’라고 한마디 남겨주길 바래요.^^ 나도 폴에게는 범상치 않은 여행가이고 싶다.


 밤이 되어 열악한 숙소에 지내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 할 수 없이 바에서 맥주 한잔을 하면서 축구를 시청한 다음 잠이 들었다.



1월 30일(목)


 열악한 숙소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을 했다. 더위와 모기로 거의 정신줄을 놓을 정도이다. 모기장이라도 준비해 놓았어야 하는데..


 서아프리카 여행이 하루 남았는데 여기에 머물다간 골병 들 것 같다. St Theresa's Convent로 옮기지 못하면 고급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오전 8시에 St Theresa's Convent로 가니 방이 있다고 한다. 와.. 이런 기쁜 소식이.. 무려 4번의 방문으로 방을 잡았다.(4고초려) 3인 침대 방에 25$이다. 오늘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추가로 5$를 내라고 한다. 방은 모텔들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하다. 모기가 없으며 전기가 빵빵하게 들어온다. 단 물이 단수 되어서 바가지에 떠서 써야 하는 정도의 여기에서는 약간의 불편함 정도?


 서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마지막 날이기에 오늘은 정비를 하면서 푹 쉬기로 했다. 내일 벨기에로 가야 하기 때문에 긴바지를 빨았다.(여분 바지는 구멍이 나서 버림)


 근처에 슈퍼마켓이 있는데 경비가 삼엄하다. 슈퍼마켓에서 점심으로 먹을 피자와 간식거리를 샀다. 중국제 라면이 있어서 컵라면과 봉지라면 하나씩을 골랐다. 이건 오늘의 저녁. 계산은 달러 위주로 하고 잔돈은 L$로 거슬러 주는데 영수증을 보니 1$에 80L$로 자동 계산 되어 있다.


 숙소에서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쉬고 있는데 배가 슬슬 아프다. 원인을 생각해보니 그 동안 너무 무리해서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말라리아 약을 먹은 탓이거나 현지 음식에 뭔가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 아플 때는 식읍을 전폐하고 쉬는 것이 상책이다.


 내일이면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향한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 서아프리카 젊은이들에게 유럽은 선망의 대상이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을 올 수 있는지 물어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들에겐 그저 내 명함을 주면서 ‘혹시 한국에 대해 궁굼 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메일을 줘.’라고 대답 할 수 밖에 없다.


아프리카 젊은이들의 유럽에 대한 열망은 다음 신문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난 떠나야 한다”… 목숨 걸고 지중해 건너는 난민들. 국민일보, 2013/10/22


“ 압데 일행이 리비아 숙소를 나선 건 지난 10일(현지시간) 오후였다. 밀입국업자들을 따라갔다. 비용은 이미 지불했다. 이탈리아까지 데려다 줄 뱃삯이었다. 유럽 땅만 밟으면 스웨덴까지는 어떻게든 올라갈 수 있다. 일행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친척이 스웨덴에 산다. 압데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출신이다. 내전이 계속되자 이주를 결심했다. 동생과 삼촌이 동행했다.◇난파땅거미 진 해안으로 이민자들이 모여들었다. 가난, 박해, 전쟁 등을 피해 집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모두 해질녘까지 기다렸다. 밀입국업자들은 배가 튼튼하다며 안심시켰다. 눈앞에 나타난 건 작은 목선이었다. 압데는 “배를 봤을 땐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더 이상 집은 없었다”고 말했다.

 약 250명을 태운 배는 얼마 못 가 불길에 휩싸였다. 이탈리아 영해에 진입한 뒤 총격을 받았다. 뒤따라오던 리비아 해안경비대가 발포한 듯했다. 반군 짓일 수도 있었다. 선장과 여자들이 총에 맞았다. 배 밑 엔진실엔 구멍이 뚫렸다. 물이 차올랐다. 승객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배는 그 상태로 이탈리아 람페두사섬 인근에 도달했다. 파도가 배를 다시 몰타 쪽으로 밀어붙였다.

 선장은 방향 감각을 잃은 듯 보였다. 소녀들은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적십자는 구조대 도착까지 40∼50분 걸린다고 응답했다. 배는 중심을 잃고 좌우로 흔들렸다. 배가 기울면 승객들은 반대편으로 몰려가며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들이 우현에 있을 때 좌현으로 몰아친 파도가 배를 뒤집었다. 파도는 물에 빠진 난민들도 갈라놨다. 일부는 일행을 찾아 헤엄쳤다. 그렇게 1시간 이상 기다린 것 같다고 압데는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난민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몰타와 이탈리아는 11일 오후 공동 구조작업을 벌였다. 생존자 221명이 몰타나 람페두사로 보내졌다. 30여명은 숨졌다. 현재 람페두사 수용시설에 있는 압데는 동생이 몰타로 갔다고 믿는다.

 삼촌 생사엔 확신이 없어 보였다.유럽으로 가는 길 람페두사 앞바다에선 지난 3일에도 밀입국 선박이 전복돼 300명 이상 숨졌다. 16일에는 몰타 해안 남서쪽에서 같은 사고가 재현됐다. 지중해 정찰 중이던 미국 해군 상륙수송함이 20∼30대 남성 128명을 구조했다.

 감비아 기니 말리 나이지리아 세네갈 등 대부분 아프리카 중동부 출신이었다. 매년 수천∼수만명이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서 지중해를 건넌다. 빈곤과 분쟁을 견디지 못하고 아프리카와 중동 등지에서 썰물처럼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작고 낡은 배에 목숨을 맡긴다.

 주요 경로는 국경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에 따라 달라졌다. 이주민이 늘면 해당 국가는 경비를 강화한다. 10년 전 대다수가 이용한 경로는 서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서지중해 루트’였다. 모로코 북부의 스페인 영토 세우타와 멜리야, 서사하라에서 가까운 카나리아 제도도 목적지나 경유지였다. 이 길로 유럽에 진입한 난민은 2006년 약 3만2000명이었다. 2011년에는 5443명까지 줄었다.

 2008∼2012년 난민들은 주로 ‘동지중해 루트’인 터키와 그리스 사이를 건넜다. 터키 수도 이스탄불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경로다. 이주민이 늘자 그리스는 경찰 1800명을 국경에 배치해 경비를 강화했다. 난민들은 국경 통제가 완화되길 기다리며 터키에서 머물고 있다. 유럽 국경관리청 프론텍스도 그리스가 삼엄한 국경 경비를 지속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던진다.

 리비아나 튀니지에서 이탈리아와 몰타 등지로 가는 ‘중지중해 루트’는 지난 10년간 난민 통행량이 주기적으로 급증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2005년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로 유입된 난민을 약 2만5000명으로 집계했다. 2009년에는 9573명으로 줄었다. 리비아 내부 분쟁이 격화한 2011년에는 6만1000명 수준까지 늘었다.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몰락한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유엔은 올해 들어 최근까지 약 3만2000명이 이탈리아와 몰타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리비아

 ‘중지중해 루트’는 대부분 압데 일행이 배를 탄 리비아 북부 해안에서 출발한다. 난민들에게 리비아는 오랫동안 최상의 출발지점으로 꼽혔다. 유럽에 근접해 있으면서 광범위하게 펼쳐진 해안선이 밀입국에 유리하다. 밀입국업자들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리비아 정세를 이용한다.

 엉망인 치안은 과도정부 수반인 알리 제이단 총리가 지난 10일 반군에 납치됐을 때 가감 없이 증명됐다. 수도 트리폴리에 머물고 있는 20대 튀니지 남성 2명은 자국보다 리비아가 유럽으로 가기에 더 쉬운 지역이라고 BBC에 말했다.

 그가 떠나온 튀니지도 유럽행 난민에게 또 하나의 주요 출발지다. 이들은 “튀니지에서 이주한다면 성공 기회는 50%지만 리비아에선 80∼90% 정도 된다고 들었다”며 “친구나 가족 중에 리비아에서 바다를 건너 유럽에 정착한 사례가 있다”고 했다. 이들 중 한 명은 튀니지에서 4차례 유럽행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충분한 돈이 마련되면 리비아에서 배를 탈 계획이다.

 “튀니지에선 이웃 남자 절반이 리비아에서 출발하는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요. 어머니의 금, 농장의 염소나 젖소 등을 팔기도 하죠.” 다른 남성(23)은 16세 이후 유럽에 가는 방법 말곤 다른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왼손 중지엔 ‘Partir|JDS’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곳 리비아 거리에선 주민 절반이 프랑스로 이주해 지금은 현지 여자랑 결혼해서 살아요. 튀니지에 투자도 하고요.

 괜찮은 삶을 사는 거죠.” 확인된 사실인지 불분명했다. 확신에 찬 그는 말을 이었다. “튀니지에선 1000년을 살아도 이룰 수 있는 게 없어요. 결혼도 못하고 가난 속에 살아야 해요.”

 유럽 이주 여정에 드는 돈은 2500달러(약 265만원) 정도다. 여정을 수월하게 해주는 ‘밀입국 반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튀니지 남성들은 말을 멈추고 더 설명하지 않았다.


 ◇위험한 여정 난민들은 여러 이유로 아프리카를 떠난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정치적 박해와 강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친척과 살기 위해. 단지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려고 떠나는 사람도 많다. 유럽행 난민 상당수가 독재나 분쟁 국가 출신이다.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로 건너온 난민은 시리아와 에리트레아 국적이 각각 75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소말리아 출신이 3000명으로 뒤를 이었다. 난민 대부분은 더 나은 삶을 담보로 위험을 감수한다.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유럽으로 이주하는 방법은 자신을 범죄조직 손에 맡기는 것뿐이다. 여정은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여행으로 시작된다. 트럭을 갈아타며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모로코 등지의 경유지와 집결지를 거친다. 지중해변에 도착하면 마지막으로 배를 탄다. 이 과정은 비싸고 위험하다. 교통수단은 열악하고 날씨는 거칠다. 밀입국 알선업자는 돈을 먼저 챙긴다. 배를 타더라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지난 20년간 바다에 빠져 죽은 난민만 약 2만명으로 추정된다. 모든 난민이 배를 타지는 않는다. 대다수는 여건이 좀 더 나은 아프리카 국가에 남아 일거리를 구한다. 원해도 승선하지 못하는 난민도 적지 않다. 리비아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난민을 체포해 구속하거나 추방해왔다. 난민이 자국으로 돌아왔을 때 망명 진위를 떠나 수감하거나 모국으로 보내기로 이탈리아와 합의한 바 있다. 인권단체들은 비난했다. 정부 연계 반군이 감시하는 구금시설은 학대와 고문 의혹을 받고 있다. 리비아에는 아직 망명자를 관리하는 법이 없다. “

 

신문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들에게는 유럽으로 가는 것을 목숨 걸고 가는데 비해 난 쉽게 가는 군. 그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일까? 지금으로서는 아프리카를 탈출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곧 그리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