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화)


 오전 8시 폴과 함께 기니 대사관에 갔다. 대사관 직원은 사진 두 장과 30,000CFA를 요구하더니 11시쯤 오라고 한다. 비자를 받으려면 여권 사본과 기니비사우 비자 사본이 있어야 한다는데? 서아프리카에서는 비자 문제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술술 풀린다. 대사관에서는 비자 심사보다는 돈 받고 판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숙소에서 정리를 하고 폴과 함께 배낭을 맨 채로 11시에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다. 그리고 곧장 택시를 잡았다. 폴은 비행장으로 난 비사우 장거리 출발지인 Paragem로 갔다.


 Paragem에서 폴과 헤어질 때 ‘폴 기념사진 찍어야 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같이 사진 찍자고 하니 폴은 ‘다음 장소에서 또 만날 텐데.’라면서 서로의 사진기에 모습을 담았다.


 2013년판 론니플래닛 서아프리카편은 기니에 대한 정보가 불과 4페이지 밖에 없다. 2010년 쿠데타가 일어나서 위험해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성의가 없어 보인다. 다행히 지난 서아프리카 여행 때 사용한 2006년 서아프리카편이 남아 있어서 기니 정보 편만 뜯어왔다.


 비사우에서 Gabu를 거쳐 코나크리로 이동하는 정보는 우리나라 여행자가 이 루트로 이동한 정보는 없다. Lonely Planet 사이트에 소수의 서양여행자의 기록을 참고했다. 그 정보도 대부분 3년 이상 지난 정보이다. 서양 여행자들의 정보에 의하면 이 구간은 산적들이 나타날 때도 있고, 군인과 경찰들이 외국인에게 돈을 뜯어가는 최악의 구간이라고 한다. 걱정은 되었지만 세계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이다. 감비아에서 뵌 오욱진 선교사님은 이 구간을 통과하셨다고 한다. 그럼 뭐 가능하겠지


 가장 불투명한 구간이기에 지금 내가 기록하는 것이 아마 최초이지 않을까 싶다.


 비사우에서 코나크리로 가기 위해서는 중부의 Gabu를 거쳐야 한다. Gabu에서 매일 아침 코나크리로 차량이 떠난다고 한다.


 비사우에서 Gabu까지는 쉐어 택시로 3시간이 걸리는데 마침 내가 갔을 때 1번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승차 체제는 오는 순서대로 자리를 잡아주기 때문에 같은 가격이라도 운이 좋으면 운전사 옆좌석. 운이 나쁜 경우는 햇빛 비치고 비좁은 맨 뒤 좌석이 걸릴 수 있다. Gabu까지 요금은 3,500CFA에 짐피 1,000CFA이다.


 손님이 거의 다 찰 때쯤 앞자리에서 출발을 기다리는데 운전사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부른다. 왜 그러지?


 차량에 군인 간부가 타는데 앞좌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럼 내가 양보 할 수밖에.. 대신 햇빛이 비취지 않는 자리를 요구하니 운전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들어주었다.


 오전 11시 35분에 차량이 출발했다. 가장 불투명한 구간이 시작된 것이다.


 번잡한 비사우를 떠나자 완만한 오르막으로 달려 점점 고도가 높아짐을 느낄 수 있다. 앞좌석에 군인 간부가 앉은 덕에 부수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모든 검문소에서 군인이 한번 손을 흔들면 검사하지도 않고 모두 통과했다. 군인은 검문소가 나타날 때마다 자신이 연예인인 마냥 웃으면서 차창 위로 손을 흔드는데 검문을 하려는 군인이 화들짝 놀라는 걸 봐서는 계급이 좀 되나보다.


 서아프리카는 검문소가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검문소에서 시비를 걸면 꼼짝없이 묶이기 때문에 운전사는 검문소에 아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최대한 반가운 척 하면서 손을 흔든다. 그럼 별로 검사하지 않고 통과.. 아니면 내려서 검문이나 뇌물..


 차량은 점점 산악 지역을 달려 오후 2시 50분 Gabu에 도착했다. 거의 쉬지 않고 달려왔다.


 Gabu는 비사우의 큰 도시에 속하지만 풍경은.. 그냥 6.25때의 흑백 기록사진이라고 보면 된다. 수십 년 된 고물 자동차에 흙이나 나무로 대충 지은 판자집.. 건조한 땅의 하늘에는 독수리들이 도시의 먹을거리를 찾아 빙빙 돌고 있다.


 애초엔 이곳에서 하루 머물고 내일 아침에 코나크리로 가는 차량을 타려고 했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아직 낮이기 때문에 국경 도시인 Kandika로 이동하기로 했다.


 Kandika까지는 2,000CFA이다. 전 차량이 막 떠난 터라 1번 자리를 받았지만 사람이 차기까지는 꽤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Gabu 시내를 둘러 볼 수 있었다. 정류장 근처에 닭장사꾼은 좋은 닭이 있다면서 4,000CFA에 가져가라고 한다.


 정류장의 차량은 스스로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손님과 짐을 잔뜩 싣고 난 후 3~4명이 차량을 밀어야 시동이 걸린다. 멍하니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꼬마 아이가 내 옆에 앉은 아빠에게 재롱을 부리더니 나를 보고는 자신이 먹고 있던 과자 하나를 건넨다. 아.. 코 묻은 손인데.. 나름 성의를 봐서 한 개 먹어주었다.


 Kandika로 오후 5시 25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저녁 시간이라 걱정되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숙소는 있겠지.. 편안 좌석에 앉은 대신 운전사 것인 계란 세 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이제 비포장도로의 시작이라 차량은 느리게 갔다.


 Kandika로 가는 도로에는 마을이 이어져 있는데 집들은 거의 진흙으로 만든 움집이다. 더 세세하게 표현하자면 이곳의 집들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복원해 놓은 집들과 비슷한 형태이다. 모든 시골마을의 공통점은 저녁 시간에는 청년들이 모여 축구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


 중간쯤 진행했을 때 운전사의 실수로 시동을 꺼트렸다. 이곳 차량은 스스로 시동을 걸 수 없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 다행히 마을 청년들이 도와줘 가까스로 시동을 걸 수 있었다.(나도 시동 거는데 일조^^)


 어둠이 짖게 깔려서 Kandika에 도착했다. 국경 도시라 별 어려움 없이 숙소를 구할 줄 알았는데 운전사는 이곳에는 잘만한 숙소가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한다.(말 보다는 몸짓?)


 그럼 어떻하지? 일단 경찰에게 가보라면서 손으로 이미그레이션을 가리킨다. 아주 약간 영어가 되는 국경 경찰에게 물어보니 이곳은 숙소가 없고, 국경도 닫혀서 오전 8시가 돼서야 연다고 한다.


 잘 데가 없다고 사정을 설명하니 그럼 이미그레이션에서 자라고 한다. 식사 할 곳이 없는지 여경에게 물어보니 닭고기 파스타를 대접해 준다. 음료수를 파는 곳을 물으니 사람을 시키더니 콜라와 물을 사다준다. 국경 경찰에게 이런 서비스를 받을 줄이야..


 식사와 세면을 하고 난 후 나를 담당(?)하게 된 여경은 자신의 자매 집에 TV를 보러 가자고 한다.


 신석기 시대의 움집에도 위성 TV가 있어 여러 사람들이 모여 TV를 보고 있다. 브라질 드라마 채널을 틀어 놨는데 우리나라 60년대 시골에서 TV를 보는 모습과 흡사하다.


 포르투갈어 방송이라 내용은 이해 못하지만 사람들의 TV보는 모습과 브라질 드라마 자체가 볼거리이다. 브라질 드라마의 남자들은 한결같이 수염 덥수룩한 얼굴에 웃통을 벗어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다. 한 배우는 계속 웃통을 벗고 있다가 자녀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 T셔츠를 입고 동화책을 읽는다.


 오후 10시쯤 TV를 다보고 이미그레이션 사무실의 한 여경의 먼지 덥수룩한 방에서 자게 되었다. 여경은 다른 방의 동료들과 함께 잔다. 여권을 맡기고 문이 잠겨진 나름의 감금의 상태에서 편하게 자 게 되었다.


 사무실은 밖이랑 그대로 연결이 되어 모기가 걱정되었지만 또 다른 원군이 사무실에 있다. 바로 박쥐이다. 박쥐는 소리를 내면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덕분에 모기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곳에 혹시 산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산적이 경찰서를 습격할 리가 있을 리는 없겠지. 그리고 지역 자체가 산적이 나타날 정도의 오지는 아니다. 단지 여행자가 없어 정보가 부재했지 이곳 역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1월 22일(수)


 오전 8시에 일어나니 여경은 출국 도장이 찍힌 여권을 건네준다. 불쑥 찾아 온 외국인을 잘 대접해 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고마운 여경에게 기념 볼펜을 3개를 선물로 건냈다.


 국경에서 기니로 가는 첫 차를 타고 기니로 넘어갔다. 국경에서는 기니 군인이 내 여권을 보더니 별 다른 뇌물 요구나 시비 없이 바로 통과시켜 준다. 이렇게 기니를 들어서게 되었다.


 기니는 15세기에 포르투갈인이 가장 먼저 왔고, 그 뒤 17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쟁탈대상이 되었다. 해안지대는 1814년에 프랑스 세력권으로 인정되어 1849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무력저항은 말린케족의 지도자 사모리 투레 등에 의해 20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1886년에 포르투갈령 기니와의 국경선을, 1889년에는 시에라리온과의 국경선을 확정하고, 1911년에 라이베리아와의 국경선을 결정하여 지금의 기니가 형성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 행정면에서 기니를 세네갈에 속하게 하여, 리비에르 뒤 쉬드(Rivires du Sud : 남쪽의 강이란 뜻)라고 하였으나, 1891년에 하나의 단위식민지로 독립시켜 1893년에 프랑스령 기니라고 명명하였다.


 기니는 1958년 9월 28일에 실시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프랑스 연방 국민투표에서 그 헌법을 거부하고 프랑스 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독립하였다.

 

1958년 11월 12일에 제정된 헌법에 따라 투레가 초대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회주의 체제의 실현과 범아프리카주의의 이념을 표방한 최초의 공화국으로 주목을 끌었고 반프랑스·반서유럽의 외교정책을 취하여 가나·말리와 더불어 일종의 사회주의적인 국가연합을 결성하였다.


 1984년 3월 대통령 투레가 사망한 후 대령 란사나 콩테(Lansana Conte)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국명을 기니인민혁명공화국에서 현재의 국명으로 고쳤다. 1990년 국민투표로 신헌법을 채택한 후 1992년에 다당제를 도입하였고, 란사나 콩테가 1993년 대통령선거에서 선출되었다.


 기니비사우와 마찬가리로 이곳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쿠데타 주역은 대위이다.


 당시 기사는 다음과 같다.

“기니 쿠데타 軍部 국정장악

카마라 대위, 임시 수반 선언… 총리 투항

아프리카 소국 기니에서 쿠데타 주도자가 임시 국가수반임을 공식 선언하고 은신 중이던 현 총리가 투항함으로써 쿠데타가 성공으로 끝났다.

FP통신 등에 따르면 쿠데타 세력에 저항하던 아흐메드 티디아네 수아레 기니 총리는 25일 약 30명의 정부 고위 관리들과 함께 구테타 지도부를 찾아가 “나 자신과 정부는 쿠테다 지도부의 처분에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서 쿠데타를 주도한 무사 다디스 카마라 육군 대위(사진)는 24일 쿠데타 이후 첫 기자회견을 열고 “나는 기니 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이자 국가민주발전위원회(CNDD) 의장임을 분명히 한다”면서“나는 군부에서 대통령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2010년 12월 신뢰성 있고 투명한 선거를 실시할 것임을 약속한다”고 덧붙였다.

카마라 대위는 이날 선도 차량을 타고 수도 코나크리 도심에서 퍼레이드를 펼쳤고, 군부는 전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는 등 본격적인 국정 장악에 나섰다.

기니는 인구 1000만 명의 소국이지만 쿠데타 여파는 작지 않다. 기니는 알루미늄 원광석인 보크사이트 세계 1위 수출국이어서 국제 광물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니 사태는 또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등 주변국 정정 불안에도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 국무부는 기니 군부세력이 민정으로 권력이양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1500만달러 원조를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워낙 변방국가라 언론에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기니는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41.31명, 사망률은 15.19명, 유아사망률은 87.17명이다. 기대수명은 49.8세로서 후천성면역 결핍증, 말라리아수면병, 기타 전염병 등의 감염률이 높은 열악한 지역이다.


 오전 8시 50분에 Sereboidos에 도착하고, 날 태워준 차량에게 1,000CFA를 건네주었다. 기니의 수도인 코나크리로 가는 차 편이 Koundara에 있다고 하기에 일단 그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국경에서 남은 32,000CFA(약 70000원)을 448,000 기니 프랑으로 환전했다. 세파프랑의 14배이다. 오전 10시 51분에 Koundara로 차량이 출발했다. 요금은 15,000기니프랑(2500원 정도)


 Koundara로 가는 길에 이번 서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산을 볼 수 있었다. 고도가 높아서 날씨도 덥지 않은 편이다. 주변 마을은 뭐.. 어제처럼 신석시대의 움집들..


 Koundara에 도착해서 Labe로 가는 차량을 잡으려다가 코나크리로 바로 가는 차량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원래 Labe에서 코나크리로 가는 차편을 잡으려고 했는데 한 번에 가는 게 좋겠지? 곧장 코나크리로 가는 티켓(155,000기니프랑)을 끊었다. 앞좌석은 2명으로 꽉 찼고 햇빛이 들지 않은 운전석 쪽 중간 좌석을 확보했다. 이제 기다림과의 사투..


 시내를 둘러보니 Gabu와 비슷한 풍경이다. 볼 것도 없고.. 그냥 정류장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정류장에서는 한국에서 온 내가 신기한지 서로 내 연락처를 달라고 한다. 명함이 남아 있어서 나눠주니 연신 고맙다고 한다.


 차량에 짐을 싣는데 과도하게 많이 싣는다. 마지막에는 닭 한 마리를 거꾸로 매다는데 그 모습이 처량하다. 땡볕에 긴 여정을 견딜 수 있을까?


 코나크리행 차량은 길쭉한 승용차에 앞좌석 2명, 중간좌석 4명, 뒷좌석 3명이 앉는 우리나라에서는 인원 과다 초과로 당장 범칙금을 물어야 하는 승객 수 구성이다. 내가 앉은 중간 좌석에 뚱뚱보 아줌마가 앉아 괴로운 상황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오후 1시 30분에 출발했다. 적어도 12시간이 걸리는 장도가 시작되었고 뚱뚱보아줌마 덕분에 갑갑한 여정이 될 것이다.


 Koundara에서 출발 할 때 시원한 아스팔트길이 펼쳐진다. 이대로 코나크리까지? 역시나 1시간 뒤에 비포장도로가 쭉 이어진다. 워낙 차에 후진 도로라 먼지가 그대로 차 안으로 들어왔다.


 코나크리까지 햇빛이 들지 않는 자리를 맡았는데 계속 햇빛을 받는다. 휴대폰의 구글 맵의 GPS를 체크해 보니 처음 예상했던 Labe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꼼짝없이 햇빛을 받을 수 밖에..


 그럭저럭 버티면서 Koimbia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입맛이 없어서 바나나를 사 먹었다. 길거리에는 염소들이 먹을 것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데 염소들에게 별 생각 없이 바나나 껍질을 던져주니 계속 달라면서 나를 따라 다닌다. 다행히 우스꽝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청년이 내가 염소들에게 포위를 당하자 염소를 쫓아준다.


 저녁 식사 이후에 그렇잖아도 좁은 차량에 더 큰일이 발생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여인에 내 옷에 토를 한 것. 승객이 오바이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량은 계속 달린다. 어떻게 수습하려고 했지만 좁아서 움직일 수 없는 처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최악의 차량 환경 속에서도 한가지 위안인 것은 운전사가 베테랑인 것.. 비포장도로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달릴 때 옆 좌석의 여인이 토 한 것을 수습하려고 갑자기 옷을 벗는다. 방법이 없어서 안쓰럽지만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하지? 알몸인 여인이 차창 바람이 춥게 느껴질 것이라 생각해 차창을 닫았다. 여인은 차량이 멈추고 나서야 짐에서 옷을 꺼내 입는다.


 예상 했던 대로 힘든 여정이기는 하지만 기니를 넘어와서 차량을 타고 보니 한가지 좋은 점을 발견했다. 바로 심하다는 군인과 경찰의 팁 요구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Labe 반대방향으로 갔다. 검문소는 별로 보이지 않았고, 뇌물 요구에 대해서는 운전사가 적당히 대처하거나 아니면 강행 돌파를 했다. 적어도 5~6 곳에 뇌물을 줘야 한다면서 작은 돈을 준비했는데, 코나크리 근처에서는 검문이 심해지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한 번도 뇌물을 주지 않았다.


 괴로운 여정이었지만 결국 이 또한 지나갔다. 새벽 2시에 코나크리에 도착했다.


 코나크리에서 아는 유일한 숙소는 Misson 카톨릭이다. 제일 저렴한 숙소이면서 코나크리 중심인 La Ville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도착해서 찾기가 막막했지만 차량에서 친해진 청년이 택시를 잡아주었다. 택시 기사는 60,000기니프랑을 요구했지만 40,000기니프랑에 합의했다. 환율이 1유로에 9250 기니프랑이라 그냥 10,000을 1유로로 치면 편하다.


 미션 카톨릭에 도착해 리셉션 문을 두드리니 한 청년이 나온다. 방을 달라고 하니 오전 8시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왜 기다려야 하지? 방을 줄 권한이 없나? 그럼 사무실에서라도 머물 수 있는지 물으니 불가능하다고 한다.


 결국 밖에서 경비원들과 함께 선잠을 자야 했다. 하루 종일 차량에서 고생하고 먼지를 완전히 뒤집어 쓴 채 숙소에서는 방을 잡지 못하고..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비사우에서 코나크리까지 무사히 왔다는 것이다. 여행기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