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토)

 

  YMCA 숙소는 시내 중심의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어 3층에서는 프리타운의 도시전경과 대서양을 감상할 수 있다. 숙박비는 아침 식사를 포함하는데 레스토랑은 1층에 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 폴’

 

 여기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렇게 어렵지 않게 또 만나다니. 벌써 4번째 만남이다. 폴은어제 오후 2시경에 도착했고, 일찍 온 덕분에 싱글룸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다음주 월요일에 라이베리아 비자를 받아 바로 비행기로 라이베리아로 떠날거라고 한다. 한국인은 라이베리아가 무비자인데..^^(결국 폴은 빠른 처리를 위해 150$(100$비자피+급행하기 위한 뇌물? 50$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YMCA 건물 지하에는 인터넷 카페가 있는데 1시간에 4000Le (1$)이다. 인터넷카페에서는 무선인터넷도 됨으로 가지고 있는 휴대폰과 넷북을 들고 가서 인터넷을 해도 된다.

 

 식사를 마치고 3층 발코니로 가니 폴이 캠코더를 들고 폴란드어로 프리타운에 대한 소개를 한다. 폴은 캠코더로 촬영한 내용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바로 업데이트 한다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일까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다.

 

 시에라리온은 사자산이라는 뜻으로,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왔을 때 해안 산지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듣고 지었다고 한다. 1787년 영국에서 이송되어 온 351명의 북아메리카 해방노예와 60명의 백인여성들(런던의 매춘부)이 정주하면서부터이다. 영국이 호주에 죄수들을 정착시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매춘부를 시에라리온에 정착시키려 했던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 후에도 해방노예의 정착은 계속되었으며, 1792년에 캐나다에서 약 1,100명의 해방노예가 이주하여 거주지로 프리타운을 건설하였다.

 

 이 후 영국은 노예해방 정책을 표방함에 따라 노예를 불법화 시켰다. 영국 해군이 대서양에서 나포한 노예선에서 풀려난 아프리카인을 프리타운에서 살게하여 1850년까지 해방노예의 수는 약 7만 5000명이나 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움직임을 강화하였으며 1951년에는 내륙의 보호령 출신인 밀턴 마게이(마르가이)가 프리타운과 보호령의 민족통일을 목표로 하는 정당을 만들었다. 1961년 4월 27일 독립, 마게이는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이후에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처럼 혼란스러운 정국이 어어진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헌법은 폐기되고 의회와 정당이 해산되었으며, 민족재편평의회 군사정권이 성립하였다.

 

 1968년 4월에 하사관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민족재편평의회 정권이 무너지고 쿠데타 직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1992년 4월에는 군부 쿠데타가 다시 일어나, 대위 스타라세가 임시국가통치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그후로도 쿠데타 기도가 잦아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1996년 3월 아흐메드 테잔 카바흐가 민선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1992년 민정붕괴로부터 시작된 시에라리온 정부군과 반군 통일혁명전선(RUF:Revolutionary United Front) 간의 내전이 계속되다가 1997년 소령 코로마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하였다.


 1998년 국제사회의 지원과 서아프리카제국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의 군사개입으로 아흐메드 테잔 카바흐가 복귀하였고 1999년 7월 통일혁명전선 (RUF) 반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2000년 5월에는 통일혁명전선 반군 지도자 샌코(Sankoh)가 내전 시 저지른 범죄로 체포· 수감되었다. 이후 UN 평화유지군 강화 및 영국군 파견에 힘입어 2000년 11월 반군과 다시 휴전을 이룬 후 정세가 안정되어가고 있다.

 

 1999년 초 들어 반군들의 공세강화로 계속되었으며, 5월까지 격렬한 저항과 공격, 반격이 반복되어 수천 명 이상이 전투로 사망하였다. 5월에는 드디어 주변국과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사태를 전기를 맞이하였고, 이러한 국면은 일부 반군 잔군들의 부분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의 증강 등에 힘입어 무기 반납 등의 절차가 2000년 2월말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엔평화유지군의 파견으로 평화정착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 했으나, 유엔평화유지군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노정시키면서, 평화유지군들이 포로가 되는 등, 2000년 전반에는 평화유지활동이 대실패로 끝났다. 11월에 RUF 반군과 극적인 정전안이 체결되었으나, 정전안에 따라 유엔평화유지군이 원활하게 배치되지 못하고 있어, 평화정착은 멀고도 험한 길로 보인다.

 

 2001년 반군 무장해제로 인해 내전이 종결되었으며, 2005년 평화유지군도 공식 철수했다. 다이아몬드 이권을 둘러 싼 내전은 종결되었으나 분쟁의 결과 국내 경제가 피폐해지고, 농업 등을 포함한 산업 기반이 붕괴되어 국가 경제를 주로 선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작은 나라인 시에라리온에 끊임없는 쿠데타와 내전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곳이 다이아몬드 집산이인 탓도 크다. 자원이 많은 나라일수록 이권이 개입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쿠데타와 전쟁이 반복이 된다.

 

 처음 시에라리온을 생각했을 때 내전의 영향이 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안정이 되고 발전 된 모습이다. 주변 나라와는 달리 검문소도 적고 건물들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무엇보다 경찰들의 뇌물 요구가 없다.

 

 프리타운은 서아프리카 연안의 훌륭한 천연의 양항으로 유명하다. 1788년 해방 노예를 이주시켜 창설한 곳으로 지명 그대로 ‘자유의 도시’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점차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위한 전진기지로 변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아프리카의 아테네’로서 아프리카인의 교육 중심지가 되었다.

 

 숙소를 나서 시내 탐방에 나섰다. 숙소 근처의 주청사(State House)는 아름다운 건물이고 이곳에서 프리타운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이지만 군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어 자세히 둘러 볼 수는 없었다.

발길을 항구 쪽으로 돌리니 거대한 시장이 나온다. 낮이긴 슬럼가 분위기로 혼자다니기에는 다소 위험해 보인다. 여기서는 사진을 찍는 것은 금물. 일단 빨리 빠져나왔다. 서아프리카의 대부분의 시장이 외국인이 혼자 다니기는 것은 위험하다. 혼자서 시장에 들어서면 꾸물거리지 말고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빨리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 특히나 도움을 준다며 다가오는 청년들은 외국인을 유인해 해꼬지 할 가능성이 있음으로 절대 따라가는 것은 금물이다.

 

 1820년에 지어진 St John's Maroon를 들렀다가 프리타운의 가장 유명한 명소이자 이곳의 랜드마크인 시내 중심부의 Coton Tree로 갔다. 웅장한 크기의 이 나무는 시에라리온의 상징으로 화폐에도 등장한다. 자세히 보니 많은 박쥐들이 나무에 붙어 있다.

 

 Cotten Tree 옆에는 국립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작은 건물에 입장료는 없는데 뭐.. 예상대로 아주 소박하다. 이곳은 지키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은행 ATM기기에서 돈을 인출하는데 한 청년이 아는 척을 한다. 어제 함께 차량을 타고 온 청년이다. 청년은 이곳에서 책노점을 하고 있다. 청년은 주변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

 

 반가운 만남을 뒤로 한 채 YMCA 숙소로 돌아왔다. 좀 더 시내를 볼까하다가 날씨가 너무 더워 일단 쉬기로 했다.

 

 시에라리온 맥주는 Star Beer로 꽤 마있다. 맥주로 갈증을 풀고 다음 여행을 위한 정비를 하였다.

 

 오전에 YMCA 리셉션에 싱글룸이 없는지 문의했으나 오늘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는데 밤이 되자 싱글룸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한다. 싱글룸으로 방을 옮기고 이미 낸 숙박비 중 오늘 차액인 50,000Le를 달라고 하니 지금 내가 있는 싱글룸은 개인 화장실이 있는 비싼 방이라며 원래는 200,000Le인데 내 생각을 해서 바꿔 준거라고 한다.

 

 그럼 뭐해.. 숙소 전체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데..

 

 방에는 벼룩과 빈대가 있어 결국 몸 여기저기에 물렸다. YMCA로 가는 분은 2층 8호실을 조심하도록.

 

 내일은 프리타운을 떠나 서아프리카 마지막 방문국인 라이베리아로 출발한다. 



1월 26일(일)

 

 YMCA 숙소는 3층 더블룸을 썼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싱글룸으로 바꾸고 나서는 벌레들에게 많이 물렸다. 결국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숙소의 전기와 물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정이 될 때 충전을 하고 샤워를 하는 것이 좋다. 프리타운뿐만 아니라 세네갈을 제외한 국가는 다 해당이 되는 사항이다.

 

 이번 서아프리카 여행의 마지막 방문 국가인 라이베리아로 출발하는 날이다. 시에라리온에서 라이베리아까지는 육로가려면 내륙 도시인 Bo를 거쳐야 한다.

 

 오전 9시 30분에 YMCA를 출발해 로리파크로 향했다. 택시 운전사에게 로리 파크로 가자고 하니 얼마를 줄건지 물어본다. 15000Le를 준다고 하니 꽤 좋아한다. 너무 많이 불렀나?

 

 로리파크에서는 프리타운에서 시에라리온 각지로 향하는 차편이 출발한다. Bo까지 가는 차량은 25,000Le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운전사가 짐피를 요구한다. 마침 옆의 버스가 Bo까지 20000Le를 부른다.

 

 운전사에게 짐피를 달라고 채근거리면 버스로 옮기겠다고 하더니 마음대로 하란다. 그러면서 버스는 오후에나 출발 할 거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즉시 짐을 챙겨 버스로 옮겼다. 하지만 버스는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40명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는데 1줄에 5명이 앉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결론적으로는 버스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오랜 시간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40명이 채워질 때까지를 기다리는데 현지인들도 열악한 버스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마치 유체 이탈을 하듯이 기다리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결국 3시간 반을 기다려 오후 1시 반이 되서야 출발했다. Bo까지 합승차량으로 가면 3시간 정도가면 되는데 버스는 느리게 진행을 했다. 다행인 것은 Bo까지는 도로가 포장이 잘 되어 있고, 내가 앉은 자리에는 뚱뚱한 사람이 없어 그나마 여유 있게 앉고 갈 수 있다는 정도..

 

 옆 좌석에 앉은 남성이 나에게 결혼을 했는지 묻는다. 안 했다고 하니까 뒷 좌석의 여인이 내가 마음에 든다면서 오늘 Bo에서 같이 가는데 어떨지 물어본다. ‘어딜 같이 가?’ 비좁은 버스에 약간의 러브라인으로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당사자인 나로서는 빨리 Bo까지 도착했으면 했다.

 

 Bo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 30분이다. Bp는 시에라리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다이아몬드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때문에 내전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저녁 늦게 도착해서 숙소를 잡아야 한다. 론니플래닛에는 Sahara Hotel을 추천했다. 이곳에는 오토바이 택시가 있는데 한번 타면 2000Le를 주면 된다. Sahara Hotel은 시계탑 부근에 있으며 이곳에서는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호텔에는 다양한 방이 있는데 화장실이 딸린 싱글룸이 80000Le(20$)이다. 호텔은 쾌적하고 시설도 괜찮다. 모기장도 있으며 무엇보다 물이 콸콸 쏟아져 샤워가 즐거울 정도이다. 문제는 전기가 왔다 갔다 한다는 점 정도?

 

 오전에는 기다림에 지쳐 힘들었지만 저녁에는 호텔 바에서 맥주한잔을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1월 27일(월)

 

 론니플래닛 서아프리카편에서 시에라리온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Tiwai섬을 추천하고 있다. 이곳은 Moa강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다양한 식물과 동물이 살고 있는 곳이다.

 

 Bo에서 라이베리아로 가는 길목에 있음으로 들러보기로 했다.

 

 Bo의 Musa Street에는 다른 지역으로 가는 차량 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Tiwai섬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일단 반다주마(Bandajuma)로 가야 한다면서 차량을 안내해 준다.

 

 Bo에서 반다주마까지 1시간(8000Le)을 달려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운데..

 

 문제는 Tiwai까지 가는 교통편이 없다는 것. 차량 운전사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갈 수 있을거라며 오토바이 택시를 부른다.

 

 오토바이는 처음에 50000Le를 부르다가 협상을 해서 40000Le에 Tiwai섬까지 가기로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Go GO~

 

 론니플래닛에는 Bo에서 라이베리아까지 차량을 타면 10~12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거리에 비해 왜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오토바이를 타면서 알게 되었다. 길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비포장을 넘어 곳곳에 패여 있거나 웅덩이가 져 있어 차량이 다니기에는 힘든 환경이다. 대신 오토바이는 그런 환경과는 무관함으로 비교적 빠르게 갈 수 있다. 그리고 산악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때문에 약간의 스릴도 보너스로 얻을 수 있다. 이곳 마을은 길을 중심으로 형성이 되어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면서 파노라마처럼 농촌 풍경을 감상 할 수 있었다. 마을을 지나면서 어린 아이들은 낯선 외국인이 신기한지 손을 흔들어 준다.

 

 오토바이는 운전사는 생각보다 거리가 멀다면서 45,000Le로 올려줄 것을 요구한다. 타면서 생각보다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는 동의를 했다. 5000Le를 더 주기로 했다.

 

 1시간 반을 달려 Tiwai섬 입구인 Kambama에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출현에 마을 장로는 따로 예약을 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한 청년이 배를 태워 섬으로 건너게 해 주었다. 청년은 섬 안의 캠프장까지 안내를 해 주었다. 도중에 야생 원숭이 떼와 마주쳤다.

 

 섬에는 2개의 캠프장이 있는데 도착한 캠프장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있고, 서양 여성이 섬에 사는 동물을 주제로 벽화를 그리고 있다. 캠프장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캠핑을 즐길 수 있다.

 

 짐을 정리하고 잠시 쉬고 있는데, 야생원숭이들이 숙소 쪽 나무로 와서 먹이 활동을 하고 있다. 원숭이를 잠깐 지켜 본 후 오늘 묵을 텐트를 정했다. 해먹이 있는 텐트를 정했다. 해먹에서 책을 읽으면서 흔들거리고 있으니 잠이 스르르 온다.

 

 오후 3시가 되자 캠프장 주인이 와서 정보를 준다. 캠프는 텐트에서 자는데 하루 80,000Le(20$)이고 저녁 식사는 15,000Le, 정글을 걸어서 투어를 하는데 가이드를 붙여서 20,000Le. 이외에도 보트 투어 등이 있지만 정글 투어 하는 것만 신청했다.

 

 정글 투어는 오후 4시 반부터 시작했다. 2시간 정도 섬을 도는데 도중에 야생원숭이와 혼백등의 동물들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는 이곳 시에라리온에서 시작해서 5500Km에 걸쳐 정글지역에 형성되어 있는데 나무로 빽빽하게 차 있고 워낙 큰 나무들이라 아래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 정글의 모습을 이곳에서는 제대로 체험 할 수 있다.

 

 정글투어가 끝나니 백인 커플이 보인다. 그들과 함게 식사를 했는데 이곳 국립공원 관리를 한다며 내일 회의가 이곳에서 있을 거라고 한다.

 

 식사를 하니 칠흙같은 어둠이 깔린다. 바로 텐트에 들어가 누웠다. 텐트 주변의 수많은 피톤치드의 영향과 식물의 향기가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거의 쉬지도 않고 달렸지.. 힘들고 외로운 여행 중에서 꿀맛 같은 휴식이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텐트 주변에서 뭔가 부스럭 거린다. 아마 원숭이나 동물이 활동하는 것 같은데.. 아차.. 배낭을 텐트 밖에도 두었구나.. 배낭 안에는 비상식량이 있음으로 원숭이가 건들수도 있다.

Tiwai섬은 아프리카의 여느 국립공원과 달리 저렴하게 야생을 체험할 수 있고 캠핑을 즐길 수 있다. 그렇지만 외국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찾는이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게 더 매력적인 요소가 아닐까?